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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라(奈良) 도쇼다이지(唐招提寺)

기자명 법보신문

唐 간진이 목숨걸고 세운 첫 계율도량

<사진설명>도쇼다이지 금당 서쪽에 있는 계단(戒壇)은 간진 화상이 전한 삼사칠증(三師七證)에 근거하여 승려의 수계가 행해진 장소다. 현재의 계단은 1978년 복원된 것이다.

그의 눈은 굳게 닫혀 있다. 가부좌를 튼 단아한 몸매, 손가락 끝으로 이어진 일원상, 빛바랜 홍조가사 사이로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어느 누구도 그의 눈빛을 본 적이 없다.

748년 일본으로 건너오는 바다에서 맞은 거센 풍랑으로 시력을 잃은 이후 그의 눈은 1300년 간 저렇게 닫혀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잃은 대신 수천 수만 일본인들의 눈을 밝혔다. 무명에 갇혀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에 광명의 빛을 전해준 것이다.

그는 불자들에게 있어 삶의 나침반이자, 수행자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인 계(戒)와 율(律)을 일본에 전해준 중국인 스님 간진(鑒眞)이다. 도쇼다이지(唐招提寺) 어영당에 모셔진 간진 스님의 눈은 굳게 닫혀 있지만, 그의 혜안이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진다. 마치 나를 향해 “내가 목숨을 걸고 전해준 계율을 그대는 단 한번이라도 가슴 속에 품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 듯 했다. 아, 이럴 때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 것인가! 그의 눈빛을 볼 수 없기에 외려 더 몸을 추스르게 하는 찬 기운이 가슴 속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중국 대원사의 승려 간진은 724년 일본 쇼무 천황으로부터 한 장의 서한을 받았다.

“우리나라(일본)의 우둔한 중생들이 부처님 법을 받아들였으나 계율이 없어 파계승이 속출하고, 속인들도 불법에 따라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파계를 하고서도 파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부디 대사께서 친히 오셔서 자신도 모르는 죄를 함부로 짓는 이 땅의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해주십시오.”

<사진설명>도쇼다이지 어영당에 모셔진 간진 스님상.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이 상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천황의 서한을 들고 온 일본 승려 요에이(榮睿), 후쇼(普照) 스님은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간진 스님께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수백 명의 제자들은 스님으로 하여금 거친 풍랑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닷길을 따라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안됩니다. 그 길은 너무 멀고 위험합니다.” “그곳은 무도(無道)한 나라이온데, 스승님의 안전 또한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진 스님은 이미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깨달음은 중생과 함께 머물고 중생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 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되더라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스님은 곧바로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결국 제자 21명 또한 함께 스님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배의 돛을 채 펴기도 전, 간진 스님의 제자 중 한 명이 일본 스님과 해적들과 결탁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중국을 떠나지 못한 스님은 두 번째 항해를 준비해 85명의 제자와 기술자들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하지만 배가 중국 땅을 뜨자마자 태풍이 몰아닥쳐 배가 크게 파손되었고, 스님은 다시 귀항해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지만 번번이 풍랑을 맞거나 당 조정의 저지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다섯 번째 항해 길에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만나 36명의 제자들이 죽는 처참한 사고를 당했고 스님의 몸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님을 모시러 온 일본의 요에이 스님과 간진 스님의 제자 상언 스님도 이때 병사했다. 간진 스님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스님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스님을 따르던 200여명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사고들도 불법을 올곧게 전하고자 하는 간진 스님의 원력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간진 스님은 주장자 한 자루에 몸을 의지한 채 또다시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풍랑이 크게 밀려올수록 스님의 의지 또한 풍랑 이상으로 더욱 커져만 갔던 것이다.

스님을 태운 배는 여섯 번의 항해라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 땅에 도착했다. 이때가 753년 12월, 일본으로 떠날 것을 결심한지 꼭 11년째 되는 해였다.

이듬해 4월, 간진 스님을 계사로 도다이지 대불전 앞에 임시로 설치된 계단에서 일본 최초의 국가적인 수계식이 열렸다. 쇼무 천황은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몸과 마음을 바쳐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간진 스님에게 깊은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것으로 일본에는 드디어 사분율에 의거한 대승불교의 계율과 계단이 설치되었다.

쇼무 천황은 스님에게 수계권을 수여하였고, 756년 스님을 대승도(大僧都)로 임명했다. 간진 스님은 759년 제자들과 함께 나라에 도쇼다이지를 세웠다. 처음 이 사찰에는 ‘당율초제사(唐律招提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는 당의 계율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파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쇼다이지에는 지금도 중국에서 건너온 다수의 불상들이 소장돼 있다. 풍랑에 시력을 잃은 간진 스님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을 이들 불보살들은 대부분 팔이 빠지거나 코가 무너지는 등 상처 입은 몸을 하고 있다. 하긴 사람도 수백 명씩 죽는 상황에서 부처님 몸이라고 어찌 성할 수 있었겠는가. 간진 스님이 배 안에서 맞았을 두려움과 고통을 모두 껴안고 있기 때문일까. 이들 불상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참담함보다는 거룩함에 가깝다. 이곳으로 자신을 이끈 수만 겁의 인연을 얼마나 갈망했을 것이며, 모진 파도에 부서지는 나약한 몸을 얼마나 한탄했으랴. 이미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일본 땅에 도착한 간진 보살과 팔·머리 등이 상한 부처님들은 이곳에 붓다의 계율을 심었다.

스님의 감긴 눈을 보노라니 “불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죽인다 해도 원하는 죽음을 베풀어준다고 생각하겠습니다”며 수아나파란타로 떠나던 붓다의 제자 부루나 존자의 모습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사진설명>간진 스님과 함께 일본에 건너온 대자재보살입상. 온몸에 상처를 입은 이 보살에게선 참담함 대신 거룩함이 느껴진다.

분명 일본인뿐만은 아닐 것이다. 붓다의 제자된 자로서 이곳에 들러 마음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자 누가 있으랴! 미풍의 파도에도 쓰러지고 봄바람 같은 유혹에도 쉽게 계를 범하는 것이 중생일진대 목숨을 걸고 계율을 전한 간진 스님의 숭고한 희생 앞에 일본인들이 감사와 참회의 마음을 품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
도쇼다이지를 찾은 일본의 하이쿠 작가 바쇼는 스님의 희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새봄의 새싹으로 스님의 눈물 닦아드리리. (若葉して おん目のしずく ぬぐはばや)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그의 조상(造像) 앞에 나는 부지불식간 머리를 조아리고 참회의 절을 올리고 있었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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