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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히에이잔 엔랴쿠지(比叡山 延曆寺)[br]콘본츄우도오(根本中堂)

기자명 법보신문

1200년간 꺼지지 않은 불멸의 法燈

<사진설명>히에이잔 콘본츄우도오(根本中堂) 전경. 이 건물은 사이초 스님이 히에이잔에 입산한 후 가장 먼저 세운 법당이다. 스님 당시에는 이치죠오시킨(一乘止觀院)으로 불리웠지만 이후 콘본츄우도오로 개칭되었다.

1월의 히에이잔(比叡山)은 설국(雪國)이다. 달포 넘게 쌓인 눈은 히에이잔 구비마다에 또 다른 구릉을 이룬 채 그 진면목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몇 시간째 헤매고 있건만 이 산 어디에도 엔랴쿠지(延曆寺)란 이름의 절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긴 세월 속에서 건물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것일까. 아니면 절마저 눈에 묻혀버린 것일까.

굽이굽이 눈길을 헤쳐 엔랴쿠지의 시작점인 토오토오(東塔) 지역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천리를 비추고 한구석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의 보배(照千一隅此則國寶)’라는 글자가 새겨진 웅장한 비석이 그 모습을 내보인다. 이 글은 히에이잔이라는 골짜기 깊은 산을 일본불교 최고의 수행처로 일군 사이초(最澄, 766~822) 스님의 가르침이다. 우주에 포함된 한 올의 먼지로 살지언정 그곳에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안다면 그 세계가 곧 법계이지 않겠는가.

날을 세운 겨울바람이 여독에 지친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차가운 감촉에 머릿속은 이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집어삼킬 듯한 추위와 맞선 채 히에이잔 한가운데 서 있는 나는, 지금 왜 이곳으로 긴 발길을 내딛고 있는 것일까. 혹여 사이초 스님이 나를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785년, 열아홉의 나이로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계를 받은 사이초 스님은 전도유망한 청년 승려였다. 귀족인 미츠노 오비토모모에(三津首百枝)를 아버지로 두고, 오미국 국분사의 대국사(大國師) 교효(行表)를 스승으로 두었기에 관승(官僧)으로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계를 받은 그 해 사이초 스님은 돌연 히에이잔으로 잠적했다. 이런 그를 두고 한쪽에서는 신령스러운 산 히에이잔에 초능력을 얻기 위해 들어간 것이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귀족 출신 젊은 승려의 객기 어린 방랑이라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사이초 스님이 쓴 ‘발원문(願文)’에는 왜 그가 히에이잔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상세히 기술돼 있다.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조차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 집착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구나. 육근(六根)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지 않는다면 결코 이 산을 내려가지 않으리라.”

천태교학에서 범부가 이를 수 있는 최고 단계인 육근청정에 다다르기 위해 사이초 스님은 히에이잔 깊은 산중에 초막을 짓고 은거에 들었다. 그리고 12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헤이안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으로부터 내공봉(內供奉) 10선사(궁정에서 봉사하는 열 명의 고승)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황실에서 법화경과 천태지자의 저작에 대한 강의를 했다.

사이초 스님에게 깊은 감화를 받은 간무 천황은 중국에서 직접 천태학을 배워와 이 나라에 천태교학을 흥륭케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사이초 스님은 1년간 중국 천태산에서 수학한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이듬해 간무 천황은 세상을 떠났고 새 천황으로 헤이세이(平城)가 등극했다.

<사진설명>콘본츄우도오에는 창건이래 1200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법등이 타오르고 있다. 이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는 50년에 한번 일반에 공개된다.

다시 히에이잔으로 돌아온 사이초 스님은 수행과 후학 양성에 열중했다. 수준 높은 학식과 엄격한 수행 지도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학승들이 히에이잔의 학당 이치죠오시킨(一乘止觀院)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히에이잔의 골짜기들은 이때부터 치열한 구도열을 불태우는 수행자들의 토굴로 채워져 갔다.

여기서, 사이초 스님이 활동하던 시대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스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헤이안 시대는 일본 고대 말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수입한 문화를 일본 스타일로 바꾸어가는 일종의 변환기였다. 이런 흐름은 불교 교학의 수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Made in China’ 바코드가 그대로 찍힌 학파 단계의 불교는 사이초 스님 이후 일본식으로 토착화된 종파불교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사이초 스님이 배워온 천태불교는 이미 중국에서부터 북지의 실천불교와 강남의 이론불교가 혼합된 종합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를 일본에 들여온 사이초 스님은 원(圓)·계(戒)·선(禪)·밀(密)을 통합한 일본식 천태교학으로 발전시켰다.

사이초 스님은 평생토록 일승주의를 정립하고 히에이잔에 대승계단을 설립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간진 스님에 의해 이미 일본에도 삼사칠증(三師七證)에 의거한 대승계단이 도다이지에 설립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히에이잔이 여법한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승가가 필요했다. 사이초 스님은 불성의 평등성을 인정하고 재가 수행자들은 물론 노비들의 성불까지 인정함으로써 기존 교파들과 대립했다. 사이초 스님은 출가수행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법상종의 입장을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법망경』에 의거한 대승계단의 수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스님은 생전에 히에이잔에 독립계단이 설립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스님이 입적한지 1주일 뒤에서야 사가 천황이 히에이잔 계단 설립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천황은 스님에게 전교대사(傳敎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이초 스님이 기틀을 마련한 엔랴쿠지는 이후 일본불교의 모태가 되어 수많은 종조들을 배출했다. 임제종의 에이사이, 조동종의 도겐, 일련종의 니치렌, 정토종의 호넨, 정토진종의 신란, 정토종의 잇펜 등 수십 명의 조사들이 다 이곳에서 수행했던 스님들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이곳 엔랴쿠지에서 기라성 같은 일본불교의 종조들이 배출됐을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인이나 각 종파의 종조가 배출되는 시기는 일정 정도 궤를 같이 한다. 이는 고대인들의 지혜가 문자로 처음 정착되는 시기, 그리고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문화가 토착화를 겪는 시점의 역사적 사명을 담당한 이들에게 그런 호칭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결국 성인도, 종조도 일정 부분은 시대가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청솔가지를 넣더라도 큰 불꽃으로 타오르는 법이라고 했던가. 일본식 토착 불교가 만들어지던 시기, 그 모태는 히에이잔이었고,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그들의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불교’라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사진설명>15세기 무로마치시대에 조성된 전교대사상.

그런 측면에서 사이초 스님은 일본의 고대불교를 중세로 실어 나른 ‘나룻배’에 비유될 수 있겠다. 고대의 끄트머리에서 ‘Made in Japan’을 표방한 그의 천태호(號)는 여전히 중국제 부품으로 채워져 있었고, 국가의 인재를 배출한다는 호국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히에이잔에서 수학한 수행자들은 사이초 스님의 천태교학을 모태로 선·교·밀·정토 등을 각각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민중들이 요구하는, 그리고 ‘중세’라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바로 가마쿠라 신불교(鎌倉 新佛敎)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사이초 스님이 788년 세운 엔랴쿠지의 본당 콘본츄우도오(根本中堂)에는 창건 이래 1200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은 불멸(不滅)의 법등(法燈)이 타오르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50년에 한번 일반에 공개된다는 약사여래를 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만난 천태종 스님에 의해 드디어 엔랴쿠지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히에이잔 엔랴쿠지. 일본 중세불교의 모태로 일컬어지는 이 절에는 역설적이게도 엔랴쿠지라는 사찰이 없다. 100여개의 탑과 암자, 법당, 불단으로 가득한 그 산 전체가 하나의 절 즉 엔랴쿠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경주 남산이 하나의 부처님으로 신앙돼 왔듯이 일본인들에게는 히에이잔이라는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토로 숭앙돼왔다. 소동파가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지 못함은 단지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었듯이, 내가 엔랴쿠지를 찾지 못함도 나의 몸이 엔랴쿠지 안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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