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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妙化龍 의상의 귀국을 보호하다-4

기자명 법보신문

선묘는 의상의 화엄전교 돕기 위한 신중의 화현

“스님께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를 성취하겠다”는
선묘의 서원은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 깃들어 있어


<사진설명>일본 『화엄연기회권』에 실려있는 선묘와 의상의 만남.

의상이나 원효가 활동했던 7세기의 한반도는 전쟁의 먼지가 사방을 덮고 있었고, 당나라와 일본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의상이 도당 유학길에 올랐던 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이듬해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나라로부터 귀국을 서둘렀던 바로 그해에 당나라는 신라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동아시아 세계를 휩쓸고 있던 그 어렵던 시절에도 의상은 흔들림 없이 구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자에게도 조국은 있었고, 그 조국이 외침으로 위태로울 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진덕왕 2년(648)에 나당군사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처음부터 동상이몽으로부터 출발했으니, 신라의 대당외교는 자구책을 위한 것이었고, 당의 속셈은 신라를 포함하는 한반도의 정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의 고종은 해동 삼국의 정벌이라는 흉계를 감춘 채 마치 신라를 도와주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그러나 출정하는 소정방(蘇定方)에게 백제를 정벌한 뒤에는 신라까지 병합하라는 명령을 몰래 내렸던 것입니다.

당나라 침공 알리려 신라 귀국

이에 따라 당의 신라 병합에 대한 흉계는 몇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었는데, 신라에 대한 군사적 위협, 분열 책동, 직접적인 정벌 계획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당군은 백제 함락 이전부터 신라의 병합을 위해 틈을 엿보면서 여러 술책을 동원했고, 신라도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 채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당간의 정면충돌은 양군이 함께 자제했는데, 고구려가 엄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당은 한반도의 정복과 통치라는 본래의 야욕을 분명히 했고, 따라서 신라와 당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9년(66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파견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당 고종은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은 신라 사신을 옥에 가둘 때부터 구체화되었습니다. 흠순 등이 은밀히 의상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둘러 귀국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의상의 귀국은 김흠순의 귀국이 허락되기에 앞서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삼국유사』 문무왕법민조에는 김인문이 의상에게 당의 신라 침공 계획, 즉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는 음모를 일러주었다고도 했습니다. 아무튼 의상의 귀국은 당의 신라 침략과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상의 귀국 동기를 단순히 당의 신라 침공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라고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668년 7월에 의상은 법계도를 지었고, 이 해 10월 29일에 스승 지엄이 입적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귀국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의 신라 침략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의 귀국이 계획보다 약간 앞당겨 졌을 수는 있어도 그의 귀국 동기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만 볼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서 편찬된 『송고승전』에는 의상의 귀국 동기를 전법(傳法)으로 밝히고 있지만, 의상의 귀국이 당의 신라 침공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서둘러졌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의상의 귀국 동기를 지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법장(法藏)과의 갈등에서 의상이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의상이 귀국하던 바로 그 해에 재속(在俗) 거사로 있던 법장이 태원사에서 출가 의식을 갖고 있음에 유의하고, 이를 의상의 귀국과 연결지어,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를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습니다. 의상과 법장은 헤어진 먼 훗날까지도 서로 소식을 전하면서 남다른 우의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신으로 확인됩니다. 의상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못 된 아쉬움보다 해동화엄초조가 된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선묘설화 화엄전교 상징적 의미

『송고승전』에 의하면, 의상은 귀국길에도 문등(文登)의 옛 신도 집을 방문합니다. 수차의 공양과 보시에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묘는 집에 없었습니다. 의상은 곧 상선(商船)을 불러 천천히 닻줄을 풀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안 선묘는 의상을 위하여 마련했던 법복과 모든 집기를 모아 상자에 담아서 해안으로 달려갔을 때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했습니다. “나의 본래 참된 마음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이 옷상자가 앞의 배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상자를 물결에 던졌습니다. 질풍이 이것을 순식간에 불어 가는데 마치 기러기 털과도 같았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 상자가 배에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다시 서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여 배를 도와 저 나라에 도달하여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매를 걷고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원력(願力)은 굽히기 어렵고 지성은 신을 감동시켜 그녀는 과연 용의 형상으로 변했습니다. 선묘화룡은 혹은 뛰고 혹은 그 배 밑에서 꿈틀거리면서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해서 저쪽 신라의 해안에 편안히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설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허구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나 아니면 신비하고 기이한 전설로 돌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전설적인 설화가 그러하듯, 이 설화에도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를 따지기에 앞서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선묘설화는 의상에게 사랑을 느낀 선묘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도심을 발한다는 내용과 두 번이나 몸을 바꾸면서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설화는 세속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한 젊은 구도자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아가씨가 털어 놓는 사랑의 고백, 그것은 그 구도자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이며 함정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상의 구도심은 여기에 꺾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아가씨 선묘를 구도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를 성취하겠다”는 선묘의 서원 속에는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고, 의상의 의연한 태도에는 참다운 구도자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선묘가 용과 부석으로 두 번이나 화신한다는 뒷부분의 이야기에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뛰어넘는 설화이기에 주의를 기울여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약이 심한 만큼 이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더욱 강조됩니다. 먼저 선묘가 용으로 바뀌는 장면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험한 뱃길이 무사하여 큰일을 성취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뜻이 엿보입니다. “내 몸이 변해서 큰 용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고 말하는 선묘의 맹세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겠다고 바다를 향해 몸을 날리는 선묘의 행동에는 이미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숭고한 종교적 자세가 선명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부축하여 무사히 신라 땅에 도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세속적 사랑의 종교적 승화

지금이야 하루 밤이면 배를 타고도 서해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산동의 위해로 가는, 그리고 1년 전에는 산동에서 인천으로 오는 큰 여객선을 타 보았습니다.

저녁에 출발한 배가 아침이면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천삼백 년 전의 배편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폭풍이나 큰 파도를 만나면 배는 낙엽처럼 흔들리고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위기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의상이 탄 배를 무사히 신라까지 보호하고,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대교를 전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선묘는 죽어서 용으로 변했다는 설화와 의상이 항상 화엄신중의 보호를 받았다는 설화는 궤를 같이 합니다. 훗날 선묘설화가 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서 화엄의 수호신으로 숭상될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동기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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