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음도량 낙산사-5

기자명 법보신문

고통중생 구원
의상의 발원
낙산사로 화현

양양 낙산의 관음신앙, 의상 대사로부터 시작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창건설화 담겨


<사진설명>조선후기 대표 화가인 김홍도의 『금강산도화첩』에 수록된 낙산사 전경.

문무왕 10년(670),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일차적으로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조정에 알렸습니다. 조정에서는 고승 명랑(明朗)의 자문에 따라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670년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신라 침략은 67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신라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여러 전투 중에서도 당의 육군을 괴멸시킨 매초성전투와 해군을 대파했던 기벌포전투는 유명합니다. 675년의 매초성 전투에서는 당나라 군사 20만명을 상대로 18회나 싸워 신라가 모두 승리했고, 다음해의 기벌포전투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나라의 오랜 야욕을 꺾을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신라인의 단합된 의지는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

신라인의 호국 염원과 의지는 사천왕사의 건립을 통해서 응결되었고, 삼국 통일을 이끌었던 신라의 주도 세력들은 불교 신앙에 의지하여 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전환했던 것입니다. 거대한 대제국 당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신라,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다지만, 신라가 당해야 했던 고통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고통 받는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며 위로할 것인가? 이것이 귀국 후 몇 년 동안의상의 화두였을 것입니다.

이에 의상은 관음보살의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을 관음보살 자비의 손길로 구하려는 발원, 그 발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망망한 삶의 바다에서 관음보살의 구원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겠습니까?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합니다.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아갔습니다. 강원도 양양의 해변 가 오봉산(五峰山)에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습니다. 낙산사의 창건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 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 한 것입니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습니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습니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는데, 이에 금 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하고, 다시 대나무는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 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습니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습니다.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낙산사 창건설화와 석익장의 낙산사기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고 했는데, 굴 앞의 50보쯤에 바위 하나가 있고, 그 위에서 의상이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는 낙산사기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성으로 기도하기 7일 만에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굴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서는 14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관음진신을 친견할 수 없어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다시 7일을 재계하여 진용을 친견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는 관음대성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산사기에 의하면 동해용이 여의주로 왕께 옥을 주었고, 이 옥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금당에 소상(塑像)을 봉안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합니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신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는 것은 의상법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낙산에는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머물고 있다고 믿는 것을 ‘관음진신주처신앙(觀音眞身住處信仰)’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의 배경은 『화엄경』에 있는데, 이 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의하면, 금강산에는 법기(法機)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음주처 신앙은 이 경전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28번째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데, 그가 곧 관음보살입니다. 관음보살은 남방 해상의 광명산(光明山), 곧 보타낙가산에서 상주 설법하고 있었는데, 선재동자가 묻는 보살도(菩薩道)에 대해, 일체 중생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서원을 세워 대비법문광명행(大悲法門光明行)을 성취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낙산의 관음신앙이 『화엄경』에 토대한 것이라면, 과연 의상에 의해 이 신앙이 유포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관음의 주처가 『육십화엄』에는 광명산으로, 『팔십화엄』에는 보타낙가산으로 되어 있는데, 『팔십화엄』은 의상이 돌아가기(702년) 직전인 699년에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타낙가산이라는 산 이름은 반드시 『팔십화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646년에 쓰여진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포달낙가산 산꼭대기에 천궁(天宮)이 있어서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뵙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 위유(慰喩)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타낙가산은 소백화산(小白花山)으로도 불리는데, 『삼국유사』에도 서역의 보타낙가산은 백의대사(白衣大士)가 머무는 곳이므로 이곳에서는 ‘소백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타낙가산이라는 지명은 『팔십화엄』에만 쓰인 것이 아니고, 또한 그 한역(漢譯)인 소백화산으로부터 의상이 백화도량(白花道場)이라는 용어를 이끌어 쓴 것으로 볼 때, 낙산의 관음신앙과 의상과의 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에서 예배·발원할 때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는데, 이런 발원이 있습니다.

이제 관음 거울 속의 제자 몸이 제자의 거울 속 관음대성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간절한 발원의 말씀 사뢰오니 가피(加被)의 힘 드리워 주옵소서. 오직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토록 관세음을 칭송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보살이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듯 저도 또한 관음대성을 정대하겠습니다.

자비에도 두 측면이 있습니다. 관음의 응현(應現)과 구제를 강조하면 타력신앙이, 그리고 중생구제를 서원하는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실천적 자비행인 이타행이 됩니다. 『법화경』에 의거한 관음신앙은 구복과 구난의 성격이 강하지만, 『화엄경』 입법계품에 의한 관음신앙은 구도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관음대성의 거울 속에 있는 제자의 몸이 제자의 거울 속에 계시는 관음대성에게 귀명정례(歸命頂禮)한다”는 발원에는 자리와 이타의 두 뜻이 있습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