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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히에이잔 엔랴쿠지[br]법화당(法華堂)·상행당(常行堂)

기자명 법보신문

히에이잔의 염불, 열도에 정토를 꽃피우다

<사진설명>히에이잔 사이토오 지역에 위치한 법화당과 상행당은 각각 ‘나무묘법연화경’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염불수행을 하던 곳이다.

법화당 전경을 찍기 위해 구릉 위로 올라서자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위로 작은 새발자국들이 어지러이 박혀있다. 그 흔적을 보니 너댓마리 산새가 한참동안 그곳에서 먹이를 찾아 노닐었던 것 같다.

사이토오(西塔)에 위치한 법화당과 상행당은 작은 다리로 연결돼 있어 앞에서 보면 한건물인데 옆에서 보면 두 건물이 된다. 이 건물은 히에이잔의 수행자들이 ‘나무묘법연화경’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법화와 아미타불의 삼매를 얻기 위해 수행하던 건물이다. 이곳 법화당과 뒤편의 흑곡은 히에이잔 속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히에이잔의 세속화를 피해 모여든 스님들의 작은 은둔처였다고 전해진다.

이곳 히에이잔에 염불이 처음 전해진 것은 엔닌 스님에 의해서이다. 중국 유학 당시 엔닌 스님은 오대산 가득히 퍼지는 음악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염불 언어에 곡조를 실은 중국 정토교의 ‘오회염불법(오회염불법)’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스님은 이곳 히에이잔에 그 음악 염불을 전했다. 사람들은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염불을 ‘산의 염불’이라 불렀고, 이는 곧 히에이잔 수행법이 되어 널리 전파됐다. 고야, 겐신, 천관, 각종 등 많은 히에이잔 스님들이 염불을 널리 전파했다. 교학이나 다른 수행법과 달리 소박한 춤과 음악을 겸비한 염불은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 후 200여 년 뒤 히에이잔에 등장한 호넨(法然, 1133∼1212) 스님은 ‘염불만이 오롯이 정토에 도달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주창해 일본 불교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열다섯 살에 히에이잔으로 출가한 호넨의 삶은 고난을 벗 삼았다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굴곡의 연속이었다. 지방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호넨은 아홉 살 되던 해에 정적이 보낸 자객으로부터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을 당했다. 당시는 부모가 입은 은혜는 더 큰 은혜로, 또 원한은 더 큰 복수로 갚아야 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호넨의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부질없는 원한과 복수로 네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대신 스님이 되어 나의 명복을 빌어 주려무나.”

호넨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히에이잔에 올라 에이쿠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호넨은 관승이 되는 대신 히에이잔에서도 가장 골짜기가 깊다는 구로다니(黑谷, 지금의 서오토오 지역)에서 머물렀다. 이곳은 위치상으로는 히에이잔 내이지만 관승으로부터 이탈한 스님들로 구성된 별도의 조직이 모여 수행하는 장소였다. 구로다니의 스님들은 정부의 통제 밖에서 활동하는 대신 양식은 스스로 구해야 했다. 이렇듯 호넨 스님은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포기했던 것이다.

<사진설명>눈덮힌 히에이잔 전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사이초 스님 이후 많은 눈 푸른 납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면서 히에이잔은 점차 일본에서도 최고의 스님들이 상주하는, 가장 청정하고 고결한 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히에이잔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세속화도 거세지기 마련이었다. 부와 명예로운 삶을 버리고 떠난 스님들의 주석처 히에이잔에도 천태계단이 마련되면서 이곳의 스님들 또한 관승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천태좌주 자리를 놓고 히에이잔 내 세력투쟁이 점점 심각해지자 회의를 품는 세력들 또한 늘어갔다. 어떤 스님들은 히에이잔에서도 가장 깊은 산 속으로 은둔처를 마련해 떠났고, 상당수의 스님들이 히에이잔에서 내려와 민중 속에 섞여 살면서 활동했다.

호넨 스님 또한 1156년 히에이잔을 내려왔다. 그리고 교토·나라 등지의 사찰을 전전하며 이십여 년 간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부터 안온한 삶을 꿈꾸며 히에이잔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으니, 지붕 밑에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따뜻한 끼니를 구하지 못한다 해서 아쉬울 건 없었다. ‘불도를 이루는 법’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된 그에게 이런저런 잡념들이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 어디에서도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43세가 되던 해, 스님은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에서 ‘일심으로 오롯이 미타의 명호를 염한다’는 문장을 읽고 회심(回心)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정토종에서 말하는 ‘회심’이란 자력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전적으로 아미타불에 의한 구제를 확신하게 되는 종교체험을 말한다.
‘내가 찾는 불도는 지금의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시대는 이미 부처님의 정법시대로부터 동떨어진 말법시대이므로 직접 수행을 해 불도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선 아미타 부처님께 의지해 정토에 들어야 한다. 그리고 정토에서 다시 태어나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수기를 받아 불도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스님이 내린 결론이었다. 스님은 자신의 저서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에서 모든 불교를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왕생을 지향한다는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오행(五行) 중에서도 입으로 아미타불을 외우는 칭명염불이야말로 유일한 정업이며, 다른 것은 그것을 도와주는 조업이므로, 칭명염불만이 절대 유일한 행이라고 평했다.

그 뒤 히가시야마산(東山) 요시미즈(吉水)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제자와 대중들에게 계율·관행·예불 등의 전통적인 수행법을 버리고 아미타불의 명호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호넨 스님 자신이 다른 수행이나 계율을 경시하거나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호넨 스님은 엄격하게 계율을 엄수하기로 유명했고, 황족이나 귀족의 수계사로 명성이 높았다. 결국 스님은 부처님이 누군지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촌무지랭이들에게까지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전수염불’을 주창했던 것이다.

호넨 스님의 전수염불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혁명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누구나 염불만으로도 정토에 들어설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세상의 모든 인간이 가진 종교적 능력의 평등을 설파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인간이 성불할 수는 없다는 법상종과, 수행의 정도에 따른 종교적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여러 수행을 겸수해온 히에이잔의 천태종 스님들이 일제히 호넨의 전수염불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넨 스님과 그 제자들은 유배를 당하고 전수염불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시코쿠 지방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곳으로 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몰려드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의 가르침이 당시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스님은 승려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평생 죄인의 몸으로 살아갔지만 스님의 삶을 추종한 수많은 제자들은 관승의 지위를 포기하고 일제히 민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진설명>법화당에서 석가당으로 가는 길에 있는 종루.

한 명의 선각자가 수백 명의 추종자들을 길러냈고, 그 물결이 결국 세상을 바꾸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히에이잔을 내려간 호넨 스님의 발걸음은 곧 일본 중세불교의 서막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의 시작이다.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한 어디에나 높고 낮음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E. H. 카와 같이 ‘역사가 결과적으로는 진보했다’고 보는 역사발전론자들은 인간의 역사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됐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신라보다는 고려가, 고려보다는 조선이 보다 열린 사회였다는 것이다.

호넨 스님이 일본에서 ‘중세 불교의 새벽’으로 추앙되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님의 교학이 옳았든 틀렸든, 그 수행법이 정법이든 아니든 그 여부를 떠나 스님의 가르침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호넨 스님과 함께 히에이잔을 내려온 염불이 일본 전역에 퍼져 골짜기마다 나무아미타불로 가득했을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수백 명의 스님과 재가 불자들이 외우는 염불소리가 창문을 뚫을 정도로 울려 퍼졌을 때 그 소리에 놀란 산비둘기들은 하늘로 날아올랐으리라. 또 산 전체가 염불에 휩싸이는, 마치 극락처럼 히에이잔은 상서로운 오색광명을 띠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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