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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삶이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기자명 법보신문

바느질 봉사 10년
장애인봉사자 김 도 순 씨

<사진설명>김도순 불자는 “봉사를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겸손’과 ‘감사’를 배웠기에 봉사를 통해 보답하는 것 뿐”이라며 활짝 웃었다.

3월 22일 서울 중랑구 신내노인요양원 2층 수선실. 전동재봉틀 소리가 요란한 이곳에 할아버지 한 분이 무엇이 급한지 연신 들락거리더니 수선된 바지를 받아들고 아이처럼 기뻐한다. 5평 남짓한 공간에 수선을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인채 김도순(62) 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찢기고, 터지고, 해진 옷들은 이곳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사연을 담고 수선실로 옮겨져 이내 김도순 씨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탈바꿈된다.

꽃다운 나이에 찾아온 장애

벌써 이곳 수선실에서 봉사를 시작한지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매주 수요일마다 어르신들의 상처를 꿰매듯 한땀 한땀 정성으로 찢기고, 터지고, 해진 옷들을 수선해 왔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10년째 소망의집, 광진학교, 강동구민회관, 조운세상, 소쩍새마을, 한국심장재단, 한국육영학교, 강동재가복지센터 등지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의 손과 발이 돼주고, 이들의 자활을 위해 재봉기술의 전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김 씨의 한 달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활동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소풍가듯 즐겁게 봉사하러 다닌다”고 말하는 김도순 씨가 봉사를 시작한 것은 그토록 자신을 옭아맸던 신체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40여년 전. 김도순 씨는 무용을 즐기고 음악을 사랑하던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졸업 이후 미래에 대한 설계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다리를 짓누르는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않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통의 주기는 짧아졌고 공포의 시간은 길어져 갔다.

결국 한쪽 다리가 빠져나갈 듯한 고통이 엄습한 후 그는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해졌다. 현재 김도순 씨는 지체장애 3급의 중증장애인이다. 20살 꽃 다운 나이에 찾아온 불행은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좌절이었다.

이후 그는 아무 곳도 나서지 않았다. 그토록 친했던 친구들과의 소식도 끊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설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이 이런 고통을 주었는지 하루에도 수백 번은 되뇌어 봤지만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토록 활발했던 성격도 소극적으로 변해갔고 매사가 부정적으로 변해버렸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집착해야만 했다. 예전과 같은 활동이 불가능하니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너무도 간절했기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말을 종종 들었던 김 씨는 당시 가장 인기 직종이었던 의상업을 선택했다. 의상실을 연 김 씨는 재봉틀을 붙잡고 온종일 일에만 매달렸다. 이내 의상실은 자리를 잡았고 규모도 제법 커졌다. 그 무렵 부모님의 성화로 결혼을 했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아이도 낳았다. 그리고 봉제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80년 초 아이의 양육을 이유로 의상실의 문을 닫았다. 이후 그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나서지는 못했다.

어렵기만 했던 살림살이도 10여년이 지나자 능숙해졌고, 아이가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여가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 속으로 다가설 수 없었기에 그의 하루는 나태하고 무료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김도순 씨에게 이웃의 불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김 씨에게 손을 내밀며 봉은사 불교대학에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무료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굳은 결심과 함께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린 시절 부처님오신날이면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가던 추억의 장소. 그나마도 불행이 찾아온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곳으로 향했다. 부처님을 뵙고 삼배를 올렸다. 30여년 만에 뵙는 부처님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따듯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도 모르는 그간의 고통과 설움을 위로받고 싶어서인 듯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날 이후 그는 조금씩 변해갔다. 불교대학 도반들과 어울리고 옛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는 등 조금씩 음지에서 양지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6년 어느 날, 일간지 귀퉁이에 소개된 자원봉사자 모집공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무슨 용기가 나서인지 교육장으로 향했다. 단 하루의 교육시간… 묘한 감동과 느낌이 떠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불편한 몸이기에 행여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부처님 법 만나 용기 얻어

그 즈음 장애인을 대상으로 운전교육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내친김에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선한 충격과 감동이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운전을 가르치는 선생님, 봉사자 모두가 장애인인 것이었다. 지금껏 ‘장애인은 봉사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일시에 깨치는 순간이었다.

넘치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중증장애아동시설인 ‘소망의집’에서 첫 봉사를 시작했다. 혼자의 힘으론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도움을 받아야할 장애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명확해 졌다.

주고 받는 역할 정해지지 않은 것

그날 밤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봉사활동을 시작할 것임을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예상대로 남편과 아들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봉사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라 정해지지 않았음을 깨달아버린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굳은 결심은 10년이 되도록 지속되고 있다.

“장애인이라고 받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되지요. 몸이 불편한 것이지 정신이 불편한 것은 아니잖아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면서 왜 나만 불행한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졌어요. 뒤늦게 철이 든 거죠.”

‘봉사시간이 늘수록 몸과 마음은 가벼워진다’는 그는 “이웃을 통해 ‘겸손’과 ‘감사’라는 큰 가르침을 배웠다”며 “아직 그 수업료를 다 내려면 한참 멀었다”고 활짝 웃었다. 지금도 그는 호스피스, 수화, 이미용기술 등 봉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익히고 준비하고 있다. 최근 컴퓨터를 배웠다는 그는 봉사가 끝나면 불교사이트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불을 모시고 염불도 하며 동호회에 봉사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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