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義持)의 실천신앙 - 8
의지(義持)의 실천신앙 - 8
  • 법보신문
  • 승인 2006.03.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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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 저자 밝히지 않음은
만법 주인없는 도리 드러낸 것
지엄은 의상에게 의지(義持), 법장에게 문지(文持)호 내려
신앙적·실천적 성향이 강한 의상의 곧은 의로움 높이 평가


<사진설명>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중국 종남산 지상사 경내. 사진제공=한국불교연구원

의상에게는 의지라는 호가 있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승 지엄이 지어 준 호이기에 더욱 소중한데도 말입니다. 의상이 종남산의 지엄문하에서 수업할 때 동문 중에는 법장(法藏, 643~712)이 있었습니다. 법장은 의상보다 18세 연하의 후배였고, 출가 이전의 행자였는데 그 스승이 입적한 2년 뒤인 28세에 머리를 깎고 수계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습니다. 지엄은 지상사에서 화엄을 배우던 제자 의상과 법장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이는 체원(體元)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에 보이는 기록입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그 장점이 있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뛰어났음을 스승은 간파했던 것 같습니다. 스승의 눈에는 제자들의 사람됨이나 장점 혹은 단점까지도 잘 보이는 법입니다. 훌륭한 스승이라면 제자들 각자가 가진 특장을 잘 살려서 발양할 수 있도록 마땅히 지도할 것입니다. 의상의 교학 및 신앙적인 특징은 스승이 그에게 준 ‘의지(義持)’라는 호에 잘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호 의지가 의미하듯, 의상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기보다는 신앙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가 부석사, 낙산사 등을 창건하고 많은 제자들에게 화엄교를 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기 자료에 의하면,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실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강의하는 일 이외에는 부지런히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수행자로서의 의상의 자세는 분명하고 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삼법의(三法衣)와 정병(淨甁)과 발우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의는 맨 안에 입는 안타회와 그 위에 입는 울다라승, 그리고 맨 위에 입는 승가리, 즉 가사를 말합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병으로 항상 몸에 차고 다니면서 정수(淨手)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삼의와 하나의 바루는 승려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임을 감안하면, 의상은 꼭 필요한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승려들이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세 가지의 옷과 발우 하나뿐이었으니, 의상은 이를 지켰던 것입니다. 국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시여하고자 하매, 그는 이를 굳이 사양하면서 토지나 노비는 『열반경』에서 규정한 부정한 재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왕에게 “빈도는 우경(盂耕)으로도 자족하다”고 했습니다. 의상의 이와 같은 자세를 당나라의 법장이나 신라의 경흥(憬興)과 비교해 보면, 수행자로서 의상의 인격은 더욱 돋보입니다. 법장은 측천무후로부터 호사스러운 보시를 받았고, 경흥은 화려하게 장식한 말을 타고 궁중에 출입했습니다. 신문왕 때의 국사 경흥은 말의 안장과 갓과 심, 모두가 화려하게 장식하여 행인들이 길을 비켰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초라한 거사로부터 충고를 받고서야 반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흥도 의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고승입니다. 의상은 평소에 몸을 세수한 후에 수건으로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도록 기다렸다고 하는데, 이는 의정의 세예법(洗穢法)을 실천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의상의 청정한 몸가짐 등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상은『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서도 일부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연기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명했습니다. 이는 의상이 말과 같이 실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상은 일생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쪽을 등지고 앉는 법이 없었다는 기록으로도 그가 얼마나 철저한 수행자며 실천적 신앙인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은『화엄일승법계도』 1권 『입법계품초기』1권『화엄십문간법관』1권 『소아미타경의기』1권 등의 저서와「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 「투사례」 「서방가」등의 게송을 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의상의 저작을 법장의 50여 부, 원효의 100여 부, 경흥의 40여 부 저술 등과 비교해 보면 의상의 경우는 대단히 적은 편입니다. 이 사실은 그가 실천을 통하여 불법의 진의를 체현하려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의상의 저술이 많지 않았던 사실과 아울러 1권의 분량을 넘어서는 저술이 한 종류도 없음 또한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화엄일승법계도』의 경우, 『법계도』에 그 자신의 약소(略疏)를 합친 것인데도 그 분량은 적은 편이고, 이 저서의 중심인 법성게는 겨우 210자의 짤막한 게송입니다.『화엄경』의 내용을 7언 30구의 짧은 게송에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의상의 『법계도』 저술에 대하여 박인량(朴寅亮)은 해동화엄시조부석존자찬(海東華嚴始祖浮石尊者讚)에서 “촌문(寸紋)으로도 비단은 알 수 있고, 하나의 털로도 봉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은 『법계도』 이외에는 저술한 것이 없지만,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하다.”고 평했습니다.

『소아미타경의기』1권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 또한 짧은 저술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경전 자체가 매우 짧은 것임에 유의할 때, 그 뜻을 요약해 쓴 의기가 길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 문장이 짧기는 게송류도 마찬가지입니다.「백화도량발원문」은 약 260여 자,「일승발원문」은 336자,「투사례」는 656자,「서방가」는 636자입니다. 200자 원고지 3장이 넘는 게송이 없습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의상은 장편의 주석이나 논설을 쓰기보다는 짧은 게송류의 글을 더 즐겨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경향은 제자 교육에도 보입니다. 표훈과 진정 등 10여 명의 제자가 의상으로부터 법계도인을 배우고 있을 때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답할 때도 의상은 긴 말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의상이 많은 말을 하기보다 짧은 게송류를 더 좋아했던 것은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를 의식한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스승 지엄의 교훈을 충실히 따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엄과 그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문답이 전합니다.

지엄사가 돌아가기 10일 전에 학도들이 나아가 물었습니다. 그 때 지엄사가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경 중의 일미진중함시방세계(一微塵中含十方世界) 및 무량겁즉일념(無量劫卽一念) 등의 말을 너희들은 무엇으로써 보느냐?” 대중이 아뢰어 말했습니다.「연기법(緣起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소(小)는 소에 머물지 아니하고, 대(大)는 대에 머물지 않으며, 단(短)은 단에 머물지 않고, 장(長)은 장에 머물지 않는 때문입니다.”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익었다.”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마라.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되니까.”

이는 『도신장(道身章)』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도신장』은 의상의 강의를 제자 도신이 기록한 것입니다. 아마도 의상이 당나라 유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배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직접 전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당시 지엄 문하에는 의상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말을 늘어놓는 제자에게, 아직도 설익었다고 하면서,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된다고 가르쳤던 지엄의 교훈은 의상에게도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지엄의 화엄교학은 그 글이 번거롭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할 때 많지 않은 저술과 게송(偈頌)류의 짧은 글을 남긴 의상의 화엄교학에는 스승 지엄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의상이 많은 글을 쓰기보다 게송류의 적은 글을 더 즐겨 쓴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일차적 이유는 의상이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것 보다는 실천적이고 신앙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그의 관심이 하근기인(下根機人)의 교화에 있었던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근기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말은 오히려 번거롭습니다. 한두 가지 간단한 교훈이라도 오래 생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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