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지통(智通) - 10
제자 지통(智通) - 10
  • 법보신문
  • 승인 2006.04.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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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로 출가… ‘추동기’ 남긴 의상의 十聖 제자
『삼국유사』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에 행적 남겨
까마귀가 출가 권유…의상에게서 『법계도』 전수


<사진설명>비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

오늘은 의상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분인 지통(智通)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이량공(伊亮公) 댁의 종이었는데, 7살 때인 용삭 초년(661, 문무왕 원년)에 출가했다고 합니다. 이 해는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때입니다. 그는 의상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낭지(朗智)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출가와 수계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

7세 어린 나이에 출가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영취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지통은 이에 따라 영취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의 나무 밑에서 쉬다가 문득 이상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나는 보현보살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이에 계를 베푼 후에 숨어버렸습니다. 지통은 마음이 막힘없이 넓어지고 문득 지혜가 두루 통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길을 가다가 한 승려를 만나 낭지스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그는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낭지를 찾느냐?” 지통이 까마귀가 말한 내용을 자세히 말하니 그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거룩한 아이가 오고 있으니, 나가서 영접하라고 하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

이에 손을 잡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신령스러운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로 오게 했고, 또 나에게 알려서 너를 맞이하게 했다. 이것은 무슨 좋은 징조일까? 아마 신령이 몰래 도우신 듯하다. 이 산의 주인은 곧 변재천녀(辯才天女)라고 전해온다.” 지통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낭지가 지통에게 계를 주려고 함에 지통이 말했습니다. “저는 동구 아래에서 이미 보현보살로부터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탄식하였습니다. “잘 했구나. 너는 이미 보살의 만분(滿分)의 계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후로 아침저녁 조심하면서 은근히 보현보살 만나기를 염원해 왔으나 오히려 정성이 감동되지 못하였는데, 이제 너는 이미 계를 받았으니, 나는 너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겠구나.” 도리어 낭지가 지통에게 예를 드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현수(普賢樹)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통이 말했습니다. “법사께서 여기 오신 것이 오래된 듯합니다.” 낭지가 답했습니다.

“법흥왕 정미(14년, 527)에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았는데,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 즉위 원년 신유(661)이니, 이로 미루어 연수를 계산하면 이미 135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삼국유사』 기록입니다. 지통은 이량공의 가노(家奴)였다고 하니,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신라에서의 출가는 엄격한 골품제사회에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천진공(天眞公)의 가노 우조(憂助)도 일곱 살에 출가하여 혜공(惠空)이라는 고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통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까마귀가 출가를 권하면서 당시의 대표적 고승인 낭지의 문하로 인도했고, 낭지를 찾아가는 길에 이미 그는 현신(現身)한 보현보살로부터 계를 받고, 또한 낭지로부터도 도리어 예를 받았다고 하니, 그는 특별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총명함과 열렬한 구도심이 크게 강조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취산에서 수행한 지가 이미 135년이나 되었다는 낭지보다도 먼저 일곱 살 지통이 보현보살의 감응을 받았다는 것도 지통의 위대성을 강조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효도 낭지의 문하에서 여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통은 오히려 낭지가 예를 표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낭지는 영취산 혁목암에 오래 머물면서 항상 『법화경』을 강의하던 특이한 승려였습니다. 영취산은 울산의 범서면 굴화리와 청량면 율리, 그리고 무거동 사이에 있습니다. 이 산의 남쪽인 율리의 안영축마을에는 영취사지가 있고, 동구에는 지통곡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에게서 계 받아

지통은 후에 의상의 처소로 가서 화엄교학을 배우고 고명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현화(玄化)에 이바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676년(문무왕 16) 이후에 제자가 되었을 것인데, 이 때 지통은 22세의 청년 승려였고, 고승 낭지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이후이니, 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출중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됩니다.

『삼국유사』에는 지통을 원효와 함께 큰 성인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지통은 의상의 문하로 옮긴 후 부석사 사십일회(四十日會), 소백산의 추동구십일회(錐洞九十日會), 태백산 대로방(大蘆房) 등지에서 스승 의상의 강의를 친히 들었습니다.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는 지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신라승 지통은 의상대덕의 십성(十聖)제자 중의 한 사람이입니다. 태백산 미리암굴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에게 정성을 다해 예했더니, 그 상(像)이 말했습니다. “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고, 나는 곧 네 미래 과보로서의 불(佛)이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후에 의상대덕을 찾아 이를 이야기했는데, 스승은 그의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통은 의상의 십성제자, 의상 문하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의상의 상족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의상이 그에게 법계도인을 주었던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의상이 소백산 추동에서 행한 90일 동안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서 정리한 『추동기(錐洞記)』 2권은 유명했습니다.

원효와 함께 고승으로 추앙

스승의 강의에 따라 그 요긴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의상이 추동에서 『화엄경』을 강의한 것은 돌아간 진정(眞定)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추동기(錐洞記)』는 추동이라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고, 또 이를 정리한 사람의 법명을 따라 『지통기(智通記)』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원래 신라 방언으로 쓰여 졌던 『추동기』를 이장용(李藏用 ; 1201-1272)이 다시 윤색하여 유통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통기』는 고려후기부터 국내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저는 일본에 전해진 『화엄경문답』 곧 『지통기』의 이본(異本)이라는 사실을 10여 년 전에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상이 입적한 702년에 지통은 48세였습니다. 따라서 지통은 8세기 전반에도 활동했을 것이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적어서 유감입니다.

의상이 9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고, 이를 토대로 지통이 『추동기』를 저술했던 소백산의 추동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추동(곧 송곳골)은 지금 풍기읍의 영전동(靈田洞)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영전사(靈田寺)가 있었는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자손들이 이곳에 종택(宗宅)을 지으면서 잔존하던 불상, 석탑, 석비 등을 땅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합니다. 1896년에 그 종택은 풍기 서부동으로 옮겨갔지만 절터는 더욱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풍기군수 유달준(兪達俊)은 당간지주를 깨뜨려 자신의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는데, 그 남은 뿌리가 1925년경까지 남아 있었다고도 합니다. 1924년에 석불 1구를 이 절터에서 발굴했는데, 6·25 동란으로 풍기읍내의 포교당인 영전사로 이 불상을 옮겨서 봉안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옛 절터에 있던 탑재 및 불상, 대좌 등도 함께 옮겨 놓았는데,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아미타불로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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