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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라(奈羅) 야쿠시지(藥師寺)

기자명 법보신문

천년 역사 앞에서
천년 후를 만나다

<사진설명>지난해 완공된 야쿠시지 대강당.

일본의 고도(古都) 나라를 찾을 때마다 수백 년 전의 낯설고 오래된 거리 속에서 헤맨다는 느낌이 든다. 인구 14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라지만 옛 아스카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이곳은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마을의 모습에 가깝다. 나라의 옛 지명은 비조(飛鳥), 혹은 명일향(明日香)으로, 둘 다 ‘아스카’로 발음된다. 날아가는 새, 즉 날새(飛鳥)는 바로 ‘내일(明日)’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현이라는 이어령 장관의 설명을 빌자면 바로 ‘내일의 고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1400여 년 전의 ‘내일의 고을’이 지금은 ‘아득한 고향 마을’로 다가오고 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일 따름이다.

나라에는 호류지, 고후쿠지, 야쿠시지, 도다이지, 도쇼다이지 등 10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사찰들이 즐비하다. 이는 미국이 2차 대전 당시 교토와 나라 등 주요문화재가 산재한 지역을 폭격 대상에서 제외한 덕분이다. 당시 아시아 총독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와 천황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이 둘을 건드리면 전후 일본 통치에 상당한 반발이 따를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는데, 교토가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나라 또한 자연스레 보호대상에 포함됐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이 이 1000년 된 유적들이 살아남은 이유가 될 수 있으랴. 일본인들의 전통에 대한 열망, 수대 째 내려오는 ‘우동 가게’를 이어받기 위해 대학교수직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성정이 없었다면 아무리 폭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 해도 수많은 문화재가 지금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으리라.

일본 최초의 문화 ‘아스카’를 꽃피운 고을, 나라는 이런 연유로 일본인들의 끈끈한 생명력이 꿈틀대는 대표적인 고토(故土)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라 야쿠시지는 1000년을 지켜온, 그리고 새로운 1000년을 내다보는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사찰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1000년 전에 조성된 동탑과, 그리고 동탑과 짝하여 지어졌으나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던 자리에 새롭게 지어진 서탑이 마주보고 서 순례 객을 반긴다. 자신들에게 1000년의 전통을 이어준 선조들에 대한 보답으로, 또 1000년 뒤의 후손에게 새로운 미래를 전해주려는 단심으로, 일본인들은 서탑이 무너진 자리에 동탑과 똑같이 생긴 탑을 건립했다.

<사진설명>야쿠시지 동탑은 780년에 세워진 것으로 다른 건물과 탑이 화재로 소실되는 중에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온 야쿠시지의 유일한 생존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6층탑이지만 세 층은 각 본층 사이에 달린 간층 지붕이라 실제로는 3층이다. 하늘에 걸린 ‘건축의 시(詩)’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전후 일본의 문화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는 패전 직후 야쿠시지를 지킨 주지 스님의 감동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그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약사사의 주지는 패전 후 다 쓰러져가는 절간 돌담 옆에서 관광객들에게 차와 과자를 팔고 있다. 주지승에게 촬영 스텝 중 한 명이 “왜 이처럼 훌륭한 문화재 옆에서 관광객들에게 녹차나 팔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건지는 몇 푼으로 후세에 길이 보전해야 하는 문화유산의 주변 청소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후 1971년부터 금당, 서탑, 현장삼장원 순으로 하나씩 유물들이 재건되었고, 지난해에 대강당까지 완공되어 야쿠시지는 과거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을 완전하게 재현하게 되었다. 야쿠시지의 재건은 주지승이 과자를 판 돈, 전후 기모노를 고친 ‘몸빼’를 입고 재건 현장으로 나섰던 일본 여인네들의 보시금,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쓰일 군수물자를 만들며 일본의 남정네들이 벌어들인 외화를 모으고 모아 이뤄낸 산물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아득한 고향 땅에 ‘차마 살아있는 미래’를 다시 세웠다.

이들의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장인정신은 1999년 약사사 대강당을 짓고 있던 당시 건설회사 사무소장의 이야기 속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은 하쿠오 시대의 건축물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혜를 짜내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을 적어도 천년후의 후세에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지어도 400년 후에는 한번 해체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의 목수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400년 후에는 더 좋은 기술을 가진 목수가 나타나 지금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이해하고 수리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한 건설현장의 현장소장조차 이처럼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문화재 보수에 임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무섭고도 대단한 나라’라는 감탄사를 절로 터져 나오게 한다.

야쿠시지 동탑은 커다란 새가 날개를 거두어 아침을 불러오던 시절, 그러니까 120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일어났던 애환과 설움을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생존자다. 그런 야쿠시지 동탑을 바라보고 서 있노라니, 문득 미당 서정주의 ‘침향’에 등장하는 질마재 사람들이 떠오른다.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沈香)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陸水)와 조수(潮水)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이곳 야쿠시지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아련한 기억 속에는 온갖 불순물이 제거된 침향에서 느껴지는 맑고 그윽한 향기가 충만하다. 그들의 향기야말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쿠시지는 본디 덴무 천황이 황후의 병환이 낫기를 발원하며 조성한 절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에도 약(藥)자가 들어가고, 금당의 본존불도 금동약사 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어떻든 덴무 천황의 간절한 발원에 불보살님들도 감복했는지, 이 절을 지은 후 황후 우노노사라라는 건강을 회복했고, 외려 남편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덴무 천황이 죽고 쿠사카베 황태자마저 재위에 오르기 전에 죽자 690년 지토(持統) 천황이 재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우노노사라라 황후다. 지토 천황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여자 천황들 가운데서 직접 정사를 이끌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

<사진설명>서탑은 16세기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81년 재건되었다. 동탑과 똑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지만, 아직 세월의 때가 묻지 않아 할머니 옆에 선 ‘뺀질뺀질한’ 손녀처럼 보인다.

자신의 남은 목숨이 여분의 삶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남편의 유업을 완성하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황위에 머물지 않았다. 황태자였던 도케치 왕자가 죽자 손자인 가루 왕자(후일 몬무 천황)를 황태자로 삼았고, 그 다음해에 양위를 하고는 황위에서 물러났다.

비록 그녀는 10년간의 길지 않은 재위기간으로 물러났지만 이 시기에 일본은 역사상에서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고 국가의 영역이 확대되는 등 ‘안정 속의 번영’을 이룩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게 되어, ‘산천도 다가와 섬기는 신의 세월’이라고 칭송될 정도다.

다이카 개신에서 후일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로 천도할 때까지의 시기는 흔히 하쿠호(白鳳) 문화라고 하여 이전의 아스카 문화와 구분된다. 이 하쿠호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 핀 시기가 바로 지토-몬무 천황의 시대였던 것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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