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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대영 스님(1903-1985)

기자명 법보신문

인욕-정진 보살로 추앙

1985년 3월 18일 입적
태주 스님 은사로 출가
15여 년 동안 인욕 수행
비구니 첫 구족계 증명


무위(無爲) 대영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남다른 인욕, 정진 수행으로 살아있는 보살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스님은 경전의 문자에만 매달리는 것을 경계하고 평생을 정진에만 힘쓰며 살아왔다. 특히 동거하는 노스님 세 분의 병을 돌보는 일에는 화 한 번 안 내고 궂은 날씨에도 큰 산과 험한 고개를 넘어 탁발로 10여 년을 시봉하는 인욕의 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영 스님은 1903년 3월 경기도 수원 근교에서 연안 이 씨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목 없는 돌부처의 머리부분을 맞춘 공덕으로 출생한 탓인지 스님은 자라면서 ‘산이 좋고 그립다’며 입버릇처럼 불교에 대한 기이한 인연을 말하곤 했다.
결국 세연을 맺은지 꼭 19년째 되던 1921년. 스님은 설악산 신흥사의 한 말사에서 태주 스님을 은사로 입산했다.

그 후 스님은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 자연의 이치에서 인과와 인연법을 깨치며 참 수행자의 열과 성을 보였다. 그리고 스님이 마곡사에서 구도자의 도정에 들어선지 불과 1년 만인 1922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때부터 스님은 견성암 주변을 돌보는 소임을 맡으면서도 예불과 참회수행에 조금도 게으름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인욕수행에 몰입한지 15여 년. 스님은 세납 35세인 1937년부터 20여 년 동안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을 비롯해 묘향산·오대산·설악산·태백산·지리산 등지의 이름 있는 산으로 수행처를 찾아 안거에 드는 등 확철대오를 향해 쉼 없는 수행을 했다. 출가 후 딱 한 번 노모의 병환으로 고향에 들른 것을 빼면 스님은 그렇게 세속과의 단절로 구법의 열정을 놓지 않고 도를 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1940년 무렵 스님의 남다른 인욕수행은 각지의 눈 푸른 납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됐다.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진리’임을 몸소 실천하던 스님은 당시 오대산 한암 스님으로부터 수행력을 인정받아 ‘무위(無爲)’라는 당호(幢號)를 받고 전법게를 수지했다.

스님은 또 만공 스님에게도 인가를 받고 ‘스승과 법제자가 서로 법맥을 잇는다’는 징표로 주장자를 받기에 이른다.

스님에게는 눈에 띄는 이력이 하나 있다. 비구니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1982년 10월 부산 범어사에서 봉행된 조계종 제2회 구족계 및 제3회 사미(니) 수계 산림법회에 증명법사로 참석한 것이다.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과 서울 청룡사에서 각각 10년씩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여력을 쏟았다. 기도와 참선을 강조했던 스님의 유지는 후학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정원(正源)·쾌성(快性)·탄성(呑性)·정덕(正德) 스님 등이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출가 후 열반할 때까지 한 번도 새벽예불을 거른 적이 없던 대영 스님은 만년에 주석하던 경남 양산 관음정사(용암사)에서 1985년 3월 18일 세납 83세, 법랍 63세로 입적했다.

최호승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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