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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표훈(表訓) -11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종찰 불국사 창건 사상적 토대 제공

8세기 중엽 최고 고승으로 추앙…금강산 표훈사 창건
의상 法孫 논란 불구 『법장화상전』에 직계 제자로 기술


<사진설명>사진은 표훈 대사가 금강산에 세운 표훈사 전경. 금강산의 많은 절들이 소실됐지만 표훈사만은 지금까지 남아 표훈의 명성을 전해주고 있다.

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표훈(表訓)은 상족(上足) 제자였습니다. 그가 의상의 십대제자, 혹은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과 찬녕의 『송고승전』, 그리고 『삼국유사』 등에서 다 같이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훈은 의상의 직제자가 아니라 의상의 법손(法孫)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대덕(大德)은 나이 50세가 되면 7년을 기한으로 임명하던 승직(僧職)이기에 750년대에 대덕을 지낸 표훈이 태어난 시기는 700년 무렵이 되고, 따라서 그는 702년에 돌아간 의상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주장의 주된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훈이 의상의 상족 제자였다는 여러 자료들을 모두 믿지 않은 채, 오직 대덕이라는 승직은 50세에 7년을 기한으로 임명되었다는 자료와 표훈이 경덕왕 때에 대덕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만 의지하여, 표훈이 의상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표훈대덕(表訓大德)’이라는 표기에서의 대덕이라는 호칭은 반드시 승직이 아니라 단순한 존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50세가 되면 7년을 기한으로 대덕에 임명할 수 있었다고 해석한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의 내용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치원이 쓴 기록 중에서도 대덕에 관해서 언급한 이 기록만을 신빙하고 표훈이 의상의 사영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법장화상전』의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기록은 오히려 믿지 않는 점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표훈, 진정 등 10여 명의 제자가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웠다는 다음의 기록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기(大記)』에서 말했다. 표훈, 진정 등 10여 대덕이 (의상)화상을 따라서 이 법계도인(法界圖 印)을 배울 때, 질문하기를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곧 법신(法身) 자체라고 하신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화상은 곧 ‘제연근본아(諸緣根本我) 일체법원심(一切法源心) 어언대요종(語言大要宗)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이라는 사구계(四句偈)로 답했다. 그리고 “자네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한다”고 하셨다. 표훈대덕은 오관(五觀)을 지어서 해석했다. 1. 실상관 (實相觀), 2. 무주관(無住觀), 3. 성기관(性起觀), 4. 연기관(緣起觀), 5. 인연관(因緣觀)이 그것이다. …

이와 같은 오관을 지어서 화상에게 드렸더니, 화상께서는 옳다고 하셨다. 진정대덕은 삼문(三門)을 지어서 해석했다. … 상원(上元) 원년(760)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설하신 것이다.

『법계도기총수록』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기』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하대에 쓰여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기』 중의 이 기록은 표훈 등이 의상으로부터 직접 『법계도』를 배우던 때에 있었던 일을 760년에 표훈이 황복사에서 강설할 때 말한 것입니다. 표훈이 오관을 지어서 화상에게 드렸더니 화상이 옳다고 인정했다는 등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음이 돋보입니다. 스승 의상과 표훈 사이에 있었던 문답은 다음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표훈대덕이 의상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무주(無住)라고 합니까?” 화상이 답했다. “곧 우리 범부 오척(五尺)의 몸이 삼제(三際),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 또 물었다. “만약 삼제에 따라 나눈다면 여러 종류의 오척이 됩니까?” 화상이 말했다. “이는 인연으로써 된 오척이기에 하나를 원하면 곧 하나가 되고 많은 것을 원하면 많은 것이 된다.” 또 물었다. “만약 삼제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유주(有住)입니까?” 화상이 말했다. “만약 오척의 머무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장래에 유주와 무주를 내가 당연히 설하겠다.”

『법계도기총수록』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기』는 의상계 화엄학승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있기에 그 자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이처럼 『고기』나 『대기』 등에 보이는 의상과 표훈 사이의 문답 등으로 볼 때, 표훈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표훈은 경덕왕(742-765) 때에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데, 김대성에게 화엄의 3종 삼매를 가르침으로서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균여(均如 : 923∼973)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는 대정각간(大正角干)이 황복사의 표훈대덕을 예방하여 세 가지 근본 삼매(三昧)를 배웠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대정(大正)은 대성(大城)의 다른 표기이고, 당시의 관등이 각간이었음에 유의하면, 아마도 중시직을 사임한 뒤인 표훈을 만난 것 같습니다. 표훈의 가르침에 의해 대성이 화엄 사상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사실을 이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성의 불국사 조영은 화엄의 불국세계를 건설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고, 이는 표훈의 영향이기도 했습니다.

표훈은 8세기 중엽의 당시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고승이었습니다. 이에 경덕왕은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표훈에게 기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표훈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태자를 얻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가 곧 8세에 즉위한 혜공왕이라는 설화가 전합니다. 즉 표훈이 상제에게 청하여 경덕왕의 후사(後嗣)를 얻게 해주었는데, 곧 8세에 즉위한 혜공왕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화에서 표훈은 천상을 왕래할 정도의 법력을 지닌 고승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경덕왕은 오래 아들을 얻지 못해서 고민하던 중 표훈의 법력을 빌려서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표훈은 굳이 아들을 얻어서 왕위를 물려주려고 고집하는 경덕왕에게 천제(天帝)의 권위를 빌려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경덕왕은 늦게 얻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서 나라가 크게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설화에 의하면, 표훈이 경덕왕과 만난 시기는 대개 757년경이 됩니다. 이 무렵에 그는 황복사(皇福寺)에 있었는데, 760년(경덕왕 19년)에도 이 절에서 강의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설화에는 표훈이 천궁(天宮)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도력을 가진 고승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표훈이 불국사에 살면서 항상 천궁을 왕래했다는 기록과도 부합합니다. 그리고 표훈이 불국사에 거주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기록이 서로 일치한다. 불국사의 창건을 주도했던 김대성이 일찍이 표훈을 방문하여 화엄교학에 관하여 물었던 인연이나, 불국사에 표훈의 부도가 전했다는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 등으로 볼 때, 그가 불국사에 주석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751년에 창건을 시작했던 불국사는 김대성이 세상을 떠난 774년 이후에 완성됩니다. 따라서 표훈이 불국사에 주석할 무렵은 상당히 고령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상이 입적한 702년(성덕왕 1년)에 표훈의 나이가 20세였다고 가정해 보더라도, 그가 황복사에서 강의하고 있던 760년은 78세에 해당하고,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김대성이 돌아간 774년은 이미 90세가 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표훈은 주로 경덕왕 대에 활동했고, 이 무렵 그의 나이는 70대, 혹은 80대 정도에 해당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훗날 표훈은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 중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신라불교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 만폭동 어구의 표훈사는 표훈이 세운 절입니다. 금강산의 많은 절이 소실되었지만 표훈사만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북한 불교의 명맥을 이어줄 뿐 아니라, 표훈의 명성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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