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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원허 인홍 스님 (1908~1997)

기자명 법보신문

비구니계 가지산 호랑이

1997년 4월14일 입적
한암 스님서 사미계 수지
비구니회 초대 총재 역임
비구니 수행자의 표상


비구니들 사이에서 ‘가지산 호랑이’라 불렸던 비구니 인홍 스님은 사찰 수호와 건립, 도제 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은 비구니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밭을 일구어 집을 마련하고 끼니는 거를지언정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식들의 교육에는 아낌없이 지원하듯 인홍 스님은 그렇게 비구니들을 위해 한 평생 자신을 희생했다.

1908년 경북 영일군에서 3남 3녀 중 2녀로 태어난 스님은 어릴 적부터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 중에서도 항상 대장부 노릇을 했다.

30여년을 속가에서 생활한 스님은 나이 34세가 되던 1941년 9월, 돌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입산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발심했을 당시 해인사를 찾았으나 선지식과 인연이 없음을 한탄한 스님은 강원도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 선사를 친견하고 진리의 법문을 들은 뒤 주저않고 머리를 깎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1941년 9월 비구니 정자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은 다음해 1월 15일 한암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5년 3월 안국동 선학원에서 동산 화상에게 비구니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1949년 부산 묘관음사에서 정진하던 중 퇴옹 성철 스님이 일러준 12가지 청규를 수행기본으로 삼고 오로지 마음 찾는 일에만 몰두한 스님은 대중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6·25동란 때 20여명의 인민군들이 스님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때 침착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지혜로 이들을 물리친 일화 등은 스님의 수행력과 위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가지산 호랑이’로 불리며 40여 년간 위풍을 드날리던 스님은 석남사 주지로 생활하며 가람수호와 불사에 전력을 투구한다. 당시 법당은 구멍이 나 하늘이 보였으며 빗물이 새지 않는 전각이 없었으나 스님은 그 곳에 대웅전, 극락전, 창화당을 중창하고 심검당 선원, 정수선원, 일주문 등 새로 지은 전각만도 20여 채에 이른다. 그러던 중 전답이 없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1962년 신행단체인 선림회를 조직해 그 결속력을 바탕으로 9천 여평에 가까운 논밭을 매입하기도 했다.

1954년 47세가 되던 해 스님은 경북 봉화의 태백산 홍제사 주지로 취임, 이듬해 대구 팔공산 동화사 총무로 부임해 전국비구니총림을 개설하고자 시도했으며 1956년부터 10여 년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면서 비구니의 위상정립을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세납 79세 때는 제 7회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별소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돼 전계불사에 참여했으며 1987년에는 비구니회 총재로 추대되어 한국비구니 승가의 상징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다.

80고령에도 3년 결사정진에 들어가 근행정진했던 스님은 1997년 4월 14일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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