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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지 만푸쿠지(萬福寺)

기자명 법보신문

망국의 恨 달래며 머나먼 이국 땅에 중국 禪을 심다

<사진설명>만푸쿠지 대법왕전 전경. 만푸쿠지에는 불상 하나, 나무 난간의 문양 하나까지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는 중국 양식으로 장엄돼 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영화 ‘홍등’에 등장하는 치파오를 입은 여인이 이층 문루에서 둥근 아치문을 열고 내려다볼 것만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 줄곧 펼쳐지고 있다.

소나무가 드리워진 높다란 솟을대문을 지나 중국등이 총총 달린 경내에 들어서자 우리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기는 이는 그 유명한 포대화상이다. 두툼한 배를 내밀고 씩 웃는 포대화상과 중국식 아치문, 그리고 처마가 길게 휘어진 이층 목조건물이 들어선 정원은 마치 내가 중국의 한 궁궐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곳은 바로 우지의 ‘차이나타운’ 만푸쿠지(萬福寺)로, 일본 속에 명나라 선맥(禪脈)을 뿌리내린 중국식 사찰이다. 만푸쿠지를 중심으로 곳곳에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작은 원(圓)들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차이나타운을 이루고 있다.

<사진설명>스님이 가리키고 있는 나무판은 만푸쿠지 스님들의 수행시간이나 공양시간을 알리는 시계 역할을 한다.

만푸쿠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젊은 사미 스님 한 분이 나와 사찰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이곳은 17세기 중반 중국에서 건너온 인겐 스님(隱元, 1593∼1661)이 창건한 사찰이며, 중국 황벽종의 선맥을 잇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비구제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만푸쿠지의 본당인 대법왕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양쪽에 서있으며, 오른쪽 벽면을 따라 18나한이 조성돼 있다. 이 조상들은 일본의 다른 사찰들에서 본 불상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역시나, 모두 중국 스님들이 제작한 것이라 한다.

이국적인 정취에 젖어, 만푸쿠지 대법왕전 앞에 서있는 꺼칠한 소나무 등짝을 어루만져 보았다. 문득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무심한 구름은 산골짝을 돌아 나오고/ 날다 지친 저 새는 둥지로 돌아온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홀로 서성거린다.

인겐 스님이 일본으로 건너온 1654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정책이 한창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는 명나라가 멸망한지 딱 10년째 되던 해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의 유입을 막고 봉건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했지만, 유일하게 나가사키 항을 개방함으로써 외국 문물의 유입이 전면 폐쇄되는 것을 막았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무역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교 특유의 군집성을 유지하며, 차이나타운을 건설하고 그 안에 중국식 사찰을 건립했는데, 이곳에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많은 스님들이 주석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의 흥복사, 만제사, 숭복사 등이 대표적인 중국 절이다.

인겐 스님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당시 나가사키 화교 불교계를 이끌고 있던 성융 스님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성융 스님은 인겐 스님에게 수차례 서한을 보내 일본 포교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일본으로 건너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있는지라, 스님은 자신이 환갑이 넘은 고령임을 들어 대신 제자 성규를 파견했다. 그런데 현해탄을 건너던 중 폭풍우를 만난 성규 스님은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 인겐 스님은 몸소 일본에서 전법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자 스님의 제자와 신도들이 눈물로 호소하며 스님을 놓아주지 않았다. 인겐 스님은 그들에게 딱 3년만 전법활동을 펼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탔다.

1654년 인겐 스님은 일본 나가사키 흥복사로 건너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스님이 일본에 건너오기 전까지 흥복사는 화교들의 장례식장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일본에 건너오면서 이 사찰에 임제종 선승들과 재가신도들이 모여들어 갑자기 선림도장(禪林道場)으로 변모했다. 스님이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은원어록(隱元語錄)』를 통해 스님의 가르침을 접했던 이들이 일본식으로 변질된 불교가 아닌 순수한 중국 선종을 배우고자 구름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중국식 등이 총총이 달린 만푸쿠지 경내.

스님이 약속했던 3년이 채 지나기도 전, 중국 만복사로부터 스님의 귀국을 요구하는 편지가 연달아 당도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에 일본 조정에 귀국의 뜻을 밝히고 중국으로의 귀환 허가를 요청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차일피일 스님의 귀국 일자를 미루며 허가를 내주질 않았다. 이미 인겐 스님이 일본 내에서 엄청난 신망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요청을 이리저리 피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스님의 귀국을 허용하지 말아달라는 스님 지지자들의 로비가 도쿠가와 막부에 작용한 탓도 있다.

일본으로 온 지 5년이 되던 해 인겐 스님은 도쿠가와 막부에 귀국을 강력히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히려 스님에게 교토 부근 우지에 토지를 드리고 산문을 개산하도록 협조할 터이니 제발 일본의 대중들을 위해 계속 머물러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다.

자신의 인연이 아직도 이 열도에 남아있음을 감지한 스님은 결국 나머지 여생을 일본에서 보낼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우지 대화전의 토지를 하사받아 1671년 중국 절과 똑같은 가람배치의 사찰을 세웠으니, 바로 우지 만푸쿠지이다.

스님은 이곳에 황벽삼단계회를 열고, 비구계단을 설립하는 한편 명나라의 선풍을 그대로 옮겨왔다. 목어와 인경 등을 사용하여 독경하는 등 모든 의식에 있어서 음악적인 리듬을 중시했고, 승가는 물론 재가자들에게도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 또한 스님은 중국에서 자신이 주석했던 황벽산 만복사의 이름을 따서, 우지의 사찰에도 만복사라 이름 붙이고, 만복사를 둘러싼 산에도 황벽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일 인겐 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을 종조로 하는 일본 황벽종을 개창했는데, 조동종·임제종과 함께 일본의 3대 선종 교단으로 일컬어진다.

인겐 스님은 6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고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21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스님은 중국 전역을 전전하다 24살에 보타산 조음동의 관음굴에서 기도하며 부처님의 가피로 아버지를 찾으려고 했다. 허나 스님은 아버지를 찾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출가의 뜻이 꺾인 스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야 중국 황벽산 만복사에서 출가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세상 곳곳을 떠돌면서도 항상 마음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야했던 스님은 일본으로 건너와 중국의 선종을 전파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항시 조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미 조국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의해 멸망했고,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조국이 없는 신세였다. 스님은 명나라가 멸망한 것을 슬퍼하여 때때로 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설명>만푸쿠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왕전의 포대화상이 방문객을 향해 너털웃음을 던진다.

잃어버린 고향은 돌아갈 곳이 없기에 더욱 그립고 그리운 것이리라. 어쩌면 스님이 이곳에 중국식 등을 달고, 포대화상을 모신 것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님은 이곳에 중국의 분위기를 담아 애절한 향수를 삼켰을 터이나 이곳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에게는 일본 속에서 잠시 일본 밖으로 이탈한 듯한 묘한 여운이 느껴진다.

절 밖으로 나오자, 작은 팻말에 18세기 만푸쿠지를 방문했던 한 비구니 스님의 하이쿠가 적혀 있다.

산문 나오니
일본인데, 차 따는
소리 들리네
山門お出れば 日本ぞ 茶摘み唄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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