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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카스가다이샤(春日大社)

기자명 법보신문

메이지정부, 불상 태운 자리에 천황 세우다

<사진설명>1869년 신불분리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 카스가다이샤는 고후쿠지가 관리하는 신사였다. 신불분리정책 이후 신사의 모든 불보살과 스님들은 신사 밖으로 쫓겨났고, 신사는 가미(神)의 전용공간이 되었다.

1868년, 나라 일대에서 활동하는 신관들이 카스가 신사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카스가 신사를 관리하던 승려들을 몰아내고 신사 안에 모셔진 불상과 불경, 불구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던졌다. 한 더미로 모아진 경전 위로 불이 당겨지고, 순식간에 불보살 상(像)들은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1000여 년 간 카스가 신사를 관리해온 고후쿠지 승려들도, 카스가에 남고 싶다면 승려를 포기하고 신관이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다 끝내 신사 밖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카스가 신사는 신관들의 차지가 되었고 고후쿠지는 폐쇄되었다. 고후쿠지의 아름다운 오층탑이 250엔에 팔렸다. 250엔은 탑을 다 태우고 난 후 남게 될 철물의 값어치였다.

19세기 중반, 야마구치와 나가사키 출신의 젊은이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국을 서구열강에 맞설 수 있는 민족국가로 만들겠다는 열망으로 1000여 년 간 교토에서 잠자고 있던 천황을 깨워 새 정권의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들이 꿈꾸는 나라는 유럽식 절대왕정의 모델을 본뜬 근대산업국가였는데, 이를 위해 도쿠가와 막부는 반드시 타도되어야할 대상이었다. 이른바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발이다. 1868년 1월 메이지정부는 왕조복고 대호령 발포에 이어 제정일치 원칙을 선포하고 곧바로 4월부터 신불분리에 관한 포고문을 연달아 발표했다.

“금번 왕정복고로 돌아감에 따라 구폐를 일신하고자 함에 있어 전국 대소 신사에서 승려 차림을 하고 별당(別堂)이라든가 사승(社僧)이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환속하라.”(1868년 4월 9일 神祇事務局達)

이 내용은 신사에서 ‘승려’로서 신직을 수행하던 이들이 승려 신분을 포기하고 신관이 되거나, 아니면 신사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신사의 본당에 모셔진 불상을 모두 신물(神物)로 대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본의 고유사상인 ‘신도’의 독립을 위한 조치였다. 아마테라스의 후손 천황이 일본의 정치적·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신도의 사상적 뒷받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불분리 정책이 곧 사원의 철폐나 불교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막상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이 내려지자 일본 전역에서 신관들이 신전으로 쳐들어가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몰아내는 광풍이 일본 전역을 휩쓸었다.

가장 먼저 히에이잔 엔랴쿠지의 지배하에 있던 히요시 신사의 신관들과 지역농민들이 히요시 신사 본전으로 들어가 불상 파괴하고 승려들을 몰아냈다. 이들을 지휘하던 쥬게 시게쿠니(樹下茂國)는 불상의 얼굴에 화살을 쏘면서 쾌재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 각지의 신관들이 신전에 난입해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쫓아내는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이들의 두 번째 타깃은 바로 나라의 고찰 고후쿠지의 관리 하에 있던 카스가 신사(春日神社)였다. 카스가 신사는 신불분리 정책의 발표 이후 고후쿠지에서 분리되고 주승들은 전원 카스가 신사의 신관이 되었다.

신불분리 정책이 곧바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이어진 사건을 단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당시 불교계가 그만큼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상실했다는 데서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중세 이후 사회 기득권을 유지해온 승려와 사원에 대한 대중의 반발에 다름 아니었다. 이미 에도 시대부터 지방 다이묘들의 사병으로 전락한 불교에 대한 불신감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막말유신기의 복고적·혁명적 에토스, 국학의 발흥, 배불론의 대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불교계에 대한 반발로 분출됐고, 당시 일본 민중들에게 만연해있던 서구 열강에 대한 불안함과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움이 폐불훼석에 대한 적극적인 동조로 이어졌다.

신도분리정책은 황실을 기축으로 하는 천황제의 재편, 그리고 국가신도체제의 형성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이 신불분리 정책은 불교계의 위축과 함께 ‘국가신도’라는 종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혹은 종교와 사상의 범주를 넘어서 현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독특한 이론을 탄생시켰다.

이 신불분리 정책은 10년 만에 끝을 맺었지만 10년간 진행된 탄압의 후유증은 엄청난 것이었다. 신불, 즉 가미와 호토케의 교묘한 결합은 1500여 년 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연결시킨 고리들을 단절시켰고, 불교는 불교대로 기득권을 잃었지만 신도 또한 불교에 의해 역사상 배양되어 온 깊은 종교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폐불훼석 실행 후 정부가 그 뒤처리를 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던 것은 큰 실책이었다. 일본인은 폐불훼석을 통해 인도심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불분리정책과 황실의 기축신앙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정신세계의 단절과 파괴는 국가신도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사상가 야스마루 요시오는 이를 국가권력에 대한 일본인들의 과잉동조적 정신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메이지유신 이후 새롭게 형성된 과잉동조적 정신성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야스마루 요시오에 따르면,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살 것을 강요받는 관습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신경증적인 불안에 빠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러니까 이런 신경증적인 정신상태의 형성이 신불분리 및 폐불훼석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는 관점이 곧 과잉동조적 정신상태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국가신도는 이후 대동아공영권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고, 야스쿠니의 이름으로, 혹은 기미가요나 히노마루로 포장된 채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사유의식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며칠 전 TV를 통해 최근 일본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미가요 제창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내용의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일장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전후 50년간 일본의 교사들은 공식행사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히노마루 게양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2003년 10월부터 학교 현장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하면서 이에 불복하는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방침을 정했다. TV에 나온 한 고등학교 음악교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느냐고, 왜 내가 옳지 못하다고 믿는 일을 국가가 강요하느냐며 그녀는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보도는 그녀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교사들이 기미가요 제창 의무화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전한다. 기미가요 의무화를 둘러싼 교육위원회와 교직원조합과 갈등에 힘겨워하던 교장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그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이 한편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저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그녀와 나 사이는 한국과 일본의 물리적 거리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 것인데 말이다. 야스쿠니 참배 문제나, 독도분쟁, 그리고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솔직히 이해보다는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오른다. 때로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분노의 불길이 타올라, 그들 전체를 부정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일본을 탐구하는 나에게조차 일본인들을 만나는 일이, 나아가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여전히 요원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이런 나의 고민을 알아챈 듯 우리 일행을 카스가 신사로 인도한 동국대 김호성 교수가 “우리가 일본인들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은 불교밖에 없다”고 귀띔한다. 그들의 불성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나를 연결시키는 인연의 끈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우리가 일본을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님의 설명을 들은 후 나는 카스가 경내의 작은 나무에 내 소망을 적은 종이를 매달았다. 그것이 나와 그들을, 그리고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시키는 작은 다리로 이어지길 소망하면서.

<사진설명>카스가다이샤 경내에 마련된 대나무 가지에 소원을 적은 종이가 대롱대롱 달려 있다.

분명 그들과 나 사이엔 현해탄과 동해를 하나로 엮는 그물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며,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만 겁의 끈이 묶여져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넘어 수백 수천 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형제를 넘어서 우주의 일부분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지 않겠는가.

여전히 일본은 우리에게 먼 이웃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들의 불성을 의심하지 않는 한, 언젠가 우리는 커다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일본불교를 순례하는, 그리고 일본 속에서 길을 잃은 채 이렇게 헤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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