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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쓰시마 스젠지(修善寺)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선비 최익현의 절개 서린 痛恨의 유배지

<사진설명>백제 비구니 스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스젠시는 면암 최익현이 단식 끝에 숨을 거둔 후 그의 유해가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여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쓰시마 앞바다, 푸른 수면 위로 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산호 빛 물보라가 부서져 내린다. 혼슈의 맨 끝인 후쿠오카 항에서 쓰시마까지는 뱃길로 147km 거리. 이 바닷길은 한반도와 이어져 있고, 이제 나의 긴 순례여정도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젯밤 혼슈를 떠나는 기념으로 마신 아사히 맥주 탓일까, 쓰시마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통증이 강해지고 있다.

쓰시마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이즈하라 항 인근에 위치한 스젠지(修善寺)라는 작은 사찰이다. 1960년대 시골마을을 연상시키는 좁고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가자 스젠지라는 현판이 보인다. 건물과 정원이 면적의 1할이면 유골탑이 9할에 달하는 ‘장의불교’의 전형적인 사찰풍경이다.

<사진설명>스젠지 경내에 마련된 면암 최익현 추모비.

경내에 들어서니 비좁은 절 마당에 면암 최익현의 추모비가 서 있다. 이곳은 쓰시마로 유배를 온 다음 일본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단식 끝에 유명을 달리한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잠시 묻혔던 곳이다.

최익현이 쓰시마에 도착한 것은 1906년이었다. 1895년 조정에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경복궁 앞으로 달려가 도끼를 머리맡에 놓고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못 자르겠다”며 추상같은 고함을 질러대던 면암 선생. 이후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에 체결되자 이듬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조직했다. 제자 임병찬과 함께 순창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다 체포된 후 결국 철천지원수의 땅 대마도로 유배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생명을 유지한 채론 차마 촌음도 머무를 수 없었던 원수의 땅에 갇힌 그는,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이 일본 정부에 의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일체의 음식물을 거부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일본 경비대장이 ‘일본 음식을 먹었으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며 갓과 탕건을 벗기고 머리를 자르려 하자, 그는 임병찬에게 자신이 죽은 뒤 뼈를 거두어 아들에게 보내라고 당부하고는 고종 황제 앞으로 유소를 써내려갔으니, 그 요지는 이렇다.

스스로 헤아리건대,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사옵니다. 이제 이놈들이 처음에는 강제로 신의 머리를 깎으려다가 마침내 다시 교활한 수단으로 달래고 위협하니 놈들의 심사를 측량할 수 없으나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리오만, 다만 역적을 능히 치지 못하고 원수를 능히 없애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여 4천년 華夏의 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꺼져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충절이자, 뼛속까지 조선의 선비였던 면암 최익현이 목숨을 거둔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6년 11월 17일이다.

그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 스님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작은 사찰 스젠지에 모셔졌다. 이듬해인 1907년 그는 백골의 처지가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에 안장됐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가 정상화된 후 한국의 문인들은 이곳 스젠지에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올해 2월 스젠지에서는 면암 선생의 원혼을 추모하는 진혼제가 열렸다.

스젠지 경내에 빼곡히 들어선 납골탑을 따라 절 맨 꼭대기로 올라갔다. 멀리 아즈하라 항에는 멸치떼처럼 다닥다닥 붙은 작은 고깃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있었다. 어쩌면 면암 선생도 이곳에 올라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있는 조선의 모습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면암의 신발 밑에는 조선의 흙이 담겨있었다고 전한다. 일본 땅에 끌려왔으나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기의 상징이다. 그렇게나마 일본을 부정하고자 한, 아니 그렇게 밖에 일본을 부정할 수 없었던 망국 선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중학시절 국사교과서를 통해 처음 만난 최익현이라는 인물은 현실과 괴리된 조선 말기의 국수주의자며, 망국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유학자의 전형에 다름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주의의 물결을 막아내기에 조선 유학자들의 대처능력은 너무도 나약했고, 주자학의 틀에 갇힌 그들의 현실감각은 무지하고 비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관점은 조선후기 성리학을 ‘망국의 道’로 배운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최익현에 대한 재평가들이 제기되고 있다. 호조참판을 역임했던 최익현은 서구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유학자들의 명분론만으로 이겨내기에는 제국주의의 물결이 너무도 거대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대신 상투머리를 고수하고 일본 정부의 음식을 거부하며 죽음을 택했던 까닭은 유학자로서의 대의명분을 지켜야할 가장 마지막 지점에 자신이 서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적 고집 차원이 아니라 그마저 머리를 자르고, 일본의 힘을 인정한다면 후대의 자손들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시대적 고민의 산물이 바로 단발령 거부와 단식자결이라는게 최근 근대사 전공자들의 평가다. 따라서 이런 그의 행보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없었던 면암의 마지막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구태의연한 위정 척사론자였다는 역사적 평가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끝까지 성리학의 명분론과 조국에 대한 절개를 지킨 진정한 조선의 유학자였기 때문이며, 그가 살았던 시대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식민지의 위기를 이겨내지 못한 유학자로 평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인연화합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 스젠지 앞바다에서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는 슬픔이나 고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느껴진다. 인간 최익현이 이곳에서 느꼈을 고독과 회한, 그리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 역사의 평가만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대마도는 부산 49.5km, 후쿠오카 147km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한국인에게는 복잡다단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머릿속을 휘젓는 모순된 생각과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며 바다를 향해 혼잣말을 되뇌었다.

<사진설명>사찰 뒷편에는 망자들의 납골탑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원혼을 그대로 갚는 것이 후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당시의 분노를 깊이 아로새기는 것도 후인들이 가져야할 온당한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 우리가 선생의 후손인 이상 당신이 이곳에서 고뇌하고 통탄하며 느꼈을 슬픔과 그리움, 충절과 의분 같은 것들을 바르게 알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라 믿습니다.”

비석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나는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것을 쓸어내리고 있다. 면암 선생의 비 앞에선 결코 울지도 원망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도 선생이 뼈저리게 절감했을 망국의 비원이 시공을 넘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가. 아무리 다짐을 되뇌고 되뇌어도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컥거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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