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5 쓰시마 반쇼인(万松院) 끝

기자명 법보신문

망국의 옹주 볼모로 시집 간 대마도주家의 원찰

<사진설명>쓰시마 반쇼인은 일본 3대 원당의 하나로, 덕혜옹주가 시집 간 쓰시마도주 집안의 도찰이다.

본당의 빛바랜 아치형 지붕이 초여름의 햇살 아래 고졸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작은 시내를 건너 삼나무 숲 쪽으로 난 긴 계단을 따라 묘지로 들어서자 음습한 기운이 가득해, 이곳이 사자(死者)의 땅임을 절로 알게 한다. 묘지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빽빽한 삼나무 숲 음기에 초여름의 싱그러움마저 묻혀버린 이곳은 쓰시마 도주 집안의 원찰 반쇼인이다.

반쇼인은 일본 3대 원당 중의 하나다. 쓰시마라는 협소하고 외떨어진 공간인 덕에 32대에 걸친 소우(宗) 집안의 존속이 가능했고, 이렇게 유서 깊은 원찰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소우 집안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가 시집온 집안이다. 그런데 옹주는 이곳 반쇼인에 뼈를 묻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공주로서 한국과 일본의 참혹한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비운의 여인 덕혜옹주. 이곳 대마도는 그녀가 살아가기에도, 또한 죽음을 맞이하기에도 너무나 척박하고 서러운 땅이었던 것이다.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이 조선총독부 데라우찌 총독에게 ‘내가 망년에 은거하면서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사는 딸’이라 소개할 정도로 고종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황제 자식들에게는 일본의 볼모라는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설명>다케유키와 결혼한 직후인 1931년 쓰시마 시댁을 방문한 덕혜옹주.

눈에 넣어도 족할 사랑하는 옹주에게 어두운 운명이 닥칠 것을 예감한 고종은 열 살 남짓한 덕혜옹주와 김황진 시종의 조카 만수의 정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조선총독부는 일본 유학을 명분으로 옹주를 도쿄의 학습원으로 강제 송출시켰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김황진, 김수재, 그리고 그녀의 정혼자인 만수 등이 상해로 그녀를 탈출시키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버렸다.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이국땅에서 혈혈단신 신세가 된 덕혜옹주는 고국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오라버니 순종 황제, 어머니 귀인 양씨의 연이은 타계 소식에 충격을 받아 열여덟살부터 몽유병과 비슷한 정신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병을 앓거나 말거나 이왕직 장관 한창수는 옹주와 대마도주의 아들인 다케유키 백작의 정략결혼을 진행시켰다. 당연히 조선의 황실은 이 결혼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비록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옹주였지만 조선 황제의 딸을 조그만 섬의 도주 집안으로 시집보낸다는 것은 조선과 대마도를 동격으로 취급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담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이 탐탁하지 않은 것은 대마도주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들 다케유키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도쿄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다케유키는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는 다케유키의 그림이 한 장 걸려있는데, 황량한 바닷가에 외로운 섬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진 그림은 다케유키가 상당히 자기세계가 강한 고독하고 외골수인 인간이었음을 알게 한다.

<사진설명>반쇼인 뒤편 쓰시마도주 집안의 묘지로 올라가는 길.

향수병으로 정신병까지 얻은 덕혜옹주와 고독한 천재 다케유키의 결혼은 비록 정략에 의한 것이었지만 처음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다케유키 백작과의 사이에서 마사에라는 딸아이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정신병이 재발하자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게다가 마사에가 일본 황실의 무시와 친구들의 이지메, 그리고 일본인과의 연애결혼 실패로 열여덟 살 나이에 자살하자 옹주의 병은 걷잡을 수없는 지경이 되었고, 1951년 끝내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이혼 후에도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격리 수감됐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도 17년이 흐른 1962년이었다. 조선왕조의 부활을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씨 황족의 귀환을 막았던 탓에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고종의 후손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덕혜옹주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낙선재로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왕실의 모든 예법을 그대로 행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고국을 떠난 지 37년만의 귀환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덕혜옹주가 부랑자인 남편과 시댁의 모진 시집살이로 정신병을 얻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그와 사뭇 다르다. 다케유키 백작은 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마사에를 지극히 이뻐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으며,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옹주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궁궐 나인들의 반대로 그녀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옹주뿐만 아니라 다케유키 백작 또한 양국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대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이즈하라 항에서 부산항으로 향하는 밤배에 올랐다. 흔들리는 배에서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어 선상으로 나섰다. 검은 바다에 간간히 떠다니는 등대의 노란 불빛이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처럼 가슴 저린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교토에서 나라로, 오사카, 야마구치 등지를 거쳐 대마도에 이르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이 하룻밤의 꿈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일본으로 향할 때 연오랑 세오녀를 찾으러 가던 나의 마음은 어느덧 아스라이 스러지고, 1600년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노인네의 심정이 되어 현해탄 한복판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이 바다는 일본의 구법승들이 목숨을 걸고 불법을 배우기 위해 건넌 ‘구도의 바다’였다. 또 망국의 한을 안고 해 뜨는 나라를 찾아갔던 백제유민들에게 ‘희망의 바다’였으며, 왜인들이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을 얻어간 ‘배움의 바다’였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일본이 총칼을 앞세우며 건너오던 ‘파멸의 바다’였다. 또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청춘을 짓밟히고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가던 한스러운 바다이기도 했다.

광활한 검은 바다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수천수만 가지 단상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처음 일본으로 건너갈 때는 그들을 알아내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이것은 자연스럽게 호기심으로 변했다. 외려 오해의 숲이 뒤덮여 있던 내 마음자리 한 구석에서는 어느새 이해의 싹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다시 찾아온 일본 땅은 내 마음 속에 여전히 많은 짐이 남겨져 있음을 깨닫게 한다.

네 차례에 걸쳐 일본불교 순례를 하는 동안 이곳 아마테라스의 땅에는 일본인들 특유의 엄청난 에너지가 잠재돼 있고, 그들의 피 속에는 사이초에서 호넨, 신란으로 이어지는 여래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뼛속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과 나 사이에는 여전히 현해탄보다 더 깊고 먼 바다가 마치 평행선처럼 흐르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두 마음은 마치 대척점과 같아서, 애증이나 용서라는 단어로 쉽게 연결되지가 않는다.

<사진설명>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전시된 다케유키의 그림. 그는 미술과 음악, 문학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은 고독한 천재였다고 전해진다.

문득 달라이라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서 용서를 배웠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해탄을 건너 대마도를 향할 때의 마음과 한반도를 향해 이곳을 건너가는 마음이 같지 아니하듯, 일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커갈수록 마음 깊숙이 드리운 미망 또한 조금씩 옅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이해의 물방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언젠가는 이 고통의 바다가 서로의 불성을 인정하는 화해와 바다가 될 것임을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본불교를 순례하는 동안 나는 사랑과 분노, 비애와 이별을 온몸으로 느끼고 배웠다.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도, 조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일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통만큼 큰 스승이 없으며, 가까운 타인은 나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지구상에서 일본만큼 한반도에 좋은 스승, 거울이 될 수 있는 나라도 없지 않은가.

쌀쌀한 기운을 한껏 담은 바닷바람이 그리운 이의 서늘한 품처럼 나의 몸을 감싸듯 스쳐가고 있다.

 takhj@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