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의 의상 - 18〈끝〉
역사상의 의상 - 18〈끝〉
  • 법보신문
  • 승인 2006.07.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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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불교에 큰 영향 끼친 위대한 성인

고려 숙종이 ‘원교국사’ 추증…스님 비석 세워 덕화 기려
일본에 큰 영향…스님 생애 그린 ‘화엄연기’일본 국보로

<사진설명>의상 스님이 주석하며 해동 화엄의 덕화를 펼쳤던 부석사 안양루 전경.

오늘은 역사상의 의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랜 역사에서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고 그리고 사라져 갔습니다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그런데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서 그 명성이 오히려 빛났습니다. 그가 전한 화엄의 밝은 빛과 지극한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준 그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의 화엄초조인 의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보개여래(寶蓋如來)의 후신(後身)으로 추앙되기도 했고, 흥륜사 금당에 소상으로 모셔졌던 신라 십성(十聖) 중의 한 분으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고려전기까지 부석사와 적천사 등에는 의상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 말의 최치원은 부석존자전, 즉 의상전을 지은 바 있고, 고려전기에는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부석존자예찬문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신라 하대인 9세기 말에는 성기(性起) 등이 모임을 조직하고 의상의 은혜를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의상의 기신(忌晨)에 그의 법은(法恩)을 입은 제자들이 모여서 법사가 남긴 교법을 되새기는 결사였습니다. 당시의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는 의상이 화엄의 법등을 전한 공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국에 불화(佛華)의 불꽃을 빛내고 방광(方廣)의 원류를 열어 놓은 이는 오직 조사의 지혜로운 교화인가 하옵니다. …… 십년 동안 정진하여 수련한 뒤 만 리에 유전시켰으며 용수의 남은 꽃다움을 떨쳐 계림의 먼 풍속에 전파하여, 미묘한 뜻을 환히 나타내었고, 법의 우뢰로써 군생(群生)의 미혹을 두루 깨우쳐 귀먹은 이들을 트여 주었고, 지혜의 달로써 눈 어두운 이들을 열어 주셨습니다. 드디어 자비의 배를 가지고 널리 중생을 제도했으며, 사람들을 교화시켜 깊이 애욕의 물줄기를 끊게 하고, 법의 수레바퀴를 오래 몰아 사람들을 구제하여 모두 화택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습니다.”

성기 등의 법제자들은 의상을 “높은 산처럼 우러러 어느 하루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상에 대한 숭배는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의상에 대한 존숭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숙종 6년(1101) 8월 계사에 조정에서는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聖人)인데 비문의 기록과 시호가 없어서 그 덕이 드러나지 않는지라 짐이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기노니, 원효대성에게는 화쟁국사(和諍國師)를, 의상대성에게는 원교국사(圓敎國師)를 추증하고, 거주하던 곳에 비석을 세우고 덕을 기록하여 무궁토록 전하게 하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처럼 고려 숙종 때에는 국가적으로 의상과 원효를 성인으로 호칭하고 국사호를 추증했으며, 비를 세웠던 것입니다. 물론 의상의 원교국사비는 부석사에 세웠습니다.

상주의 공덕산에는 미면사(米麵寺) 혹은 백련사(白蓮寺)라고도 하는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의상법사가 이 절에 살면서 강의를 할 때면 용녀(龍女)가 항상 모셨다고 합니다. 또 뜰에는 좌우에 우물이 있어서, 한 우물에서는 쌀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면((麵)이 나오는데 매일 한결같아서 비록 많은 대중이 있어도 공양이 모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미면사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의상을 모셨다는 용녀는 용이 되어 신라까지 따라온 선묘일 것이고, 그 용녀가 살고 있는 우물에서 쌀과 면이 나와서 대중이 공양할 수 있었다는 것도 선묘가 의상을 도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절에는 또 의상의 설법대와 삿갓과 석장(錫杖)이 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최자(崔滋)가 고종 28년(1241)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이 절을 방문했을 때까지도 오래된 전각에 원효와 의상의 진용(眞容)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에 흙비와 먼지로 더럽혀진 채였다고 합니다. 또 의상의 삿갓과 석장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팡이는 상징성이 강합니다. 몸의 일부처럼 짚고 다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손 떼도 묻은 것이기에 당연히 상징적 의미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의상의 도력에 얽힌 설화가 부석사에 전하고 있었습니다. 의상이 짚고 다녔던 지팡이가 선비화로 자라났다는 설화입니다. 의상이 득도한 뒤에 서역의 천축으로 들어가려 할 때 평소 거처하던 방문 앞의 낙수 지는 자리에 주장자를 꽂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이 주장자에 반드시 가지와 잎이 생겨날 것이며,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그가 떠난 뒤에 승려들이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그가 거처하던 방안에 안치했습니다. 창문 밖에 꽂아 놓은 주장자는 바로 가지와 잎이 생겨나 아무리 해와 달만 내리비치고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아도 죽지 않고 집 높이만큼 자란 뒤에는 더 자라지도 않은 채 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광해군 때의 영남관찰사 정조(鄭造)가 이 절에 와서 보고 “선인(仙人)이 짚던 지팡이이니, 나도 짚어보고 싶다”며 베어갔지만, 바로 이어 두 줄기가 생겨나 이전처럼 자랐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사철 푸르고 또 잎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승려들이 이를 비선화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상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전하는 선비화에 관한 전설입니다. 퇴계의 선비화시에도 “지팡이 머리에 원래 조계수(曹溪水) 있어(杖頭自有曹溪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不借乾坤雨露恩)”라고 읊었습니다.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리고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처마 밑에서도 자랄 수 있는 것은 지팡이 끝에 깨달음의 법수(法水)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미인 듯합니다. 선비화의 전설처럼 의상이 전한 화엄의 진리는 아직도 마르지 않았고, 그 선비화가 아직도 살아 있듯이 의상은 역사에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의상의 명성은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특히 가마꾸라시대(鎌倉時代)의 묘오에(明惠: 1173-1232)는 의상을 무척이나 숭배했습니다. 묘오에는 교토시의 교외에 고산사(高山寺)를 창건하여 일본 화엄종을 다시 일으켰던 대표적인 고승입니다. 그는 원효와 의상을 무척 흠모했으며, 그가 성인(成忍)에게 부탁하여 의상과 원효의 생애를 그림으로 그린 『화엄연기(華嚴緣起)』 6권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전하는데, 이들을 대명신(大明神)으로 숭앙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전부터입니다. 이 영정의 뒷면에는 대승정(大僧正) 유증(宥證)이 1761년에 쓴 보수기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1223년에는 고산사의 별원으로 선묘사(善妙寺)가 종행(宗行)의 후실인 선니(禪尼)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이 절에는 선묘신상을 조성해 모시고 선니 등 38명의 비구니가 수행했다고 합니다. 설화적 인물인 선묘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어, 화엄을 수호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불운의 시대에 고통 받던 일본 여인들이 흠모하는 여인상으로 받들어졌습니다. 지금도 고산사에는 당시의 선묘신상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목조채색의 이 상은 머리를 묵고 당의(唐衣)를 입었으며, 나막신을 신은 입상으로 작은 광주리를 다소곳이 들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고산사 입구의 마을 뒷산에는 지금도 선묘신사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직접 이 신사를 답사한 바 있습니다. 비록 매우 작고 거의 무너질 듯 초라한 신사였습니다만, 선묘신사라는 제액을 보며 무척이나 감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법장이 의상스님에게 보냈던 서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나 번에 했습니다만, 지극한 정성을 담아서 쓴,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가득 스며있는 편지였습니다. 이 친필 편지가 일본의 천리(天理)대학에 귀중본으로 소장되고 있으니, 의상의 명성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에 빛날 것입니다.

의상에 대한 강의는 오늘로 일단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강의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번 강의는 이 정도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삼백 년 세월의 강을 건너 만나는 의상, 참으로 반갑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너무 멀어서 때로는 전설처럼 아득하기도 했고, 때로는 멀리서 가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사가 전한 화엄사상 만은 21세기 오늘에도 더욱 분명한 의미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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