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畵僧들][1] 금호 약효 상

기자명 법보신문

머슴살이 역경 딛고 최고 화승 반열 올라

<사진설명>금호 스님 진영.

연재 ‘한국의 화승들’에서는 당대 화승이 남긴 업적과 여정의 길을 찾아봄으로써 법보신문 독자들과 함께 탱화가 선사하는 색다른 불심을 피워보고자 한다.

화승 선정에 있어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서 3대 혹은 4대의 맥이 통찰된 화승을 기준 삼았다. 그 이유는 현재 미술학계에서 ‘화승의 맥’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지만 사실상 초기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17세기 이전과 19세기 이후의 화승 맥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당대 화승 중 금호, 의겸, 임한, 고산, 월주 화승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편집자주〉


충청도서 활약 ‘계룡산파’ 구축

불보종찰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을 참배하며 정면과 측면에 봉안된 탱화에 시선을 두어 본 적이 있는가! 이 탱화는 우리 불교미술계 특히 불화를 연구하는 학술계나 예술인들에게는 대장경판과 또 다른 신선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불화다. 이 탱화에서 당대의 화승 금호, 고산, 기전, 위상 스님들의 정취를 한 번에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 해인사 대적광전의 삼신불(석가모니니불·사진)을 출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금호 약효 스님은 186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100여점의 불화를 조성한 당대 손꼽히는 화원 중의 한 분이다. 범어사 괘불, 법주사 팔상전 팔상도, 화장사 감로도를 조성한 금호 스님은 마곡사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활약함에 따라 일명 ‘계룡산파’를 형성했다.

한국 근대불화계의 한 획을 그은 금호 스님이 붓을 잡은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금호 스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태화산인(泰華山人)이라는 사람이 좥월간 법시좦에 기고한 글과 석정 스님의 구술, 비문을 통해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금호 스님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다. 1860년대의 경제를 감안하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생을 이어갔을 지는 확연하게 떠오른다. 조실무모 직후 유랑걸식 하던 그는 15,6세께까지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며 머슴살이를 하다 16세 께 급기야 예산군 신암면 화암사로 입산해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여느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험난한 세파 속에서 춥고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입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실부모 후 유랑걸식

여기서 잠깐 그의 출가 사찰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금호 스님의 출가 사찰과 관련해서는 화암사를 비롯해 금탑사(金塔寺), 영탑사(靈塔寺) 등이 거론 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당시 출가 사찰이 ‘금탑사’라고 했던 석정 스님은 최근 금호 스님의 ‘비문찬’을 통해 ‘화암사’로 바꿨고 태화산인(泰華山人)의 구술 역시 화암사로 되어 있어 현재로서는 화암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용모가 청순하고 마음씨가 착해 매사 근면성실하고 인사규범이 분명했던 그는 행자 시절에도 사중 스님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행자물이 어느 정도 들자 한 스님이 물었다.

“이제 그만 행자 생활을 끝내고 중 될 생각 없느냐?”
“저같이 무식한 고아도 스님이 될 수 있습니까?”
“미리부터 배워 중 된 사람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스님이 된 후에 의식과 불경을 배운다. 내가 너를 진실하게 보았기에 권하는 것이다.”
“스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금호 스님은 한글부터 깨우친 후 초발심경문을 배우며 조석예불에 이어 각종 의식을 하나씩 습득해 갔고, 법당에 들어서서는 예불과 공양을 올릴 때 마다 ‘큰 스님’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스님이 된 후에도 금호 스님은 세속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중의 스님들 역시 공양은 탁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중 스님들과 탁발한 후 울력을 하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금호 스님에게도 점차 회의감이 밀려왔음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스님이 되면 양식 걱정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만사해결 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식생활 해결하느라 공부할 여가가 없으니 속인보다 나을게 없구나.”

그 무렵. 금호 스님의 인생 여정의 전환점이 될 만한 인연을 맺는다. 그토록 스님이 기도한 원력이 가피를 입는 일대 사건(?)이었다.

화엄사는 봉안된 불상이 심하게 손상됨은 물론 탱화마저 낡자 화원 스님을 청해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사중은 어려운 실정에도 화원 스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이를 본 금호 스님은 그 화원 스님에게 물었다.

습화 1만장 10년만에 도편수

“화원 스님도 탁발 하십니까?”
“동냥이 다 무언가. 우리는 일 년 내내 불사만 하기에도 여념이 없네. 경제도 넉넉해 굳이 탁발은 하지 않고 있지.”

순간, 금호 스님은 ‘탁발을 면하려면 화원이 되는 길 밖에 없구나’ 결심 하고는 그 스님을 따라다니며 낮에는 불사를 돕고 밤에는 습화(習畵)를 시작해 10년도 채 되지 않아 도편수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금호 스님은 항상 유성(恒常 有成) 화원이 명화원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출초(出草)를 그렸는데 그 수가 몇 만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금호 스님의 화원 스승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화암사 불사를 맡은 화승에 의해 불화에 입문했지만 그 화승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 춘담 봉은(春潭 奉恩), 수룡 기전(水龍 琪銓), 천기(天基) 등이 거론되고 있다.

『혜사 문명대 교수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에 실린 원광대 김정희 교수의 ‘금호당 약효와 남방화소 계룡산파’논거는 춘담 봉은에 무게를 실으며 천기 스님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논의는 되지 못했지만 전문가에 따라 수룡기전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이채롭다.

스승은 춘담 봉은 가능성 커

<사진설명>금호 스님이 출초한 해인사 대적광전 삼신탱. (석가모니불)

금호 스님의 작품을 살펴본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마곡사 석가모니불화에서 횡으로 권속들을 배치한 구도, 봉곡사 석가모니불화의 활짝 핀 연꽃대좌, 아미타 수인과 유사한 석가모니의 손 모양, 횡으로 긴 화면에 석가를 중심으로 협시 및 2보살, 사천왕, 10대 제자를 배치한 구도, 은적암 칠성도의 청색과 하늘색을 교대로 칠하여 청련대좌를 표현하는 기법 등은 약효가 그린 봉녕사 석가모니불화, 정혜사 극락전 칠성도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며 “마곡사에서 활동하던 춘담 봉은에게 불화를 배웠거나 봉녕사 석가모니불화 및 칠성도를 함께 그린 천기에게서 불화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고 논거했다. 또한 김 교수는 “항상 유성의 초를 보고 익혔다고 한 기록에 의거해 볼 때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나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수룡 기전의 가능성은 금호 스님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평가 받는 ‘해인사 대적광전 삼신불화’ 중 ‘석가모니 불화’〈사진〉인데 이 삼신불화 조성에는 다수의 화승이 참여했다. 석사모니 불화는 금호 스님이, 비로자나 불화는 수룡 기전, 노사나불화는 고산이 각각 출초했다. 여기서 ‘석가모니불화’는 수룡 기전이 수화사가 되었고 출초를 금호 스님이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스승이 수룡 기전일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춘담 봉은에 무게가 실린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자료협조 및 문헌
한국미술사연구소. 성보문화재연구원. 김정희 교수 논문 ‘금호당 약효와 남방화소 계룡산파’. ‘선정겸수정혜원명항작불사광리군생금호당반효대불모비’.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