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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畵僧들]〈3〉 금호 약효 하

기자명 법보신문

법융-정연-문성 배출…근현대 불화 초석

<사진설명>갑사 대웅전 현왕도.
<사진설명>마곡사 영은암 산신도.

금호 약효 스님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60대 초반의 대표작이라 하면 범어사 괘불과 범어사 나한전 16나한도, 갑사 대웅전 현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세 작품에서도 ‘범어사 16 나한도’는 기존의 작품 양식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목된다.

인물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기법으로 표현했는데 배경 화면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짙은 청록으로 그린 산수는 전체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언뜻 ‘나한도’라기 보다는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더욱이 용과 거북 등의 상서로운 동물과 갈지(之)자 형식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반쯤 드러난 산들은 환상과 기괴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기괴함’은 ‘음영법’이 완벽하게 구사되지 않은 데 따른 것일수도 있다. 사실 이 시기에 ‘서양식 음영법’을 능수능란하게 펼쳤다는 고산 축연(古山 竺演)과도 많은 합작을 해온 금호지만 당시로서는 서양의 이색적인 음영법을 완벽하게 체득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갑사 대웅전 현왕도〈사진〉는 기존의 금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점을 한 눈에 보여준다.

금호 스님은 이 작품에서 불화에서 즐겨 사용하지 않는 검은색으로 현왕과 권속의 옷을 칠했다. 또한 현왕 뒤에 배치한 병풍 안에 조선말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수묵산수를 그려 넣었다. 주요 인물 뒷편에 병풍을 배치한 점은 물론 이 병풍 속의 그림을 옅은 산수화로 표현하는 것은 금호 스님의 전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금호 스님 화풍의 이 같은 변화는 1910년대에 이르러 그동안 고수해 온 ‘진채’(眞彩)위주의 기법에서 ‘담채’(淡彩) 로의 전이와 맥을 같이한다.

원광대 김정희 교수는 금호 스님의 후반기 화풍 변화의 연유를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수채화에 가까운 옅은 채색과 원색이 아닌 중간 색조를 사용한다던지, 전통불화의 주조색이었던 적색과 녹색 위주가 아닌 양록과 청색, 황색 위주의 채색을 사용하는 등 담채불화만의 독특한 채색기법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일본을 통해 서양화법이 전래되고 그로 인하여 수채화 같은 기법이 불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양 정혜사 관음암 칠성도(1911년)를 비롯해 마곡사 청련암 칠성도(1912년), 마곡사 백련암 칠성도(1914년), 마곡사 영은암 산신도(1918년·사진) 등에서 이러한 화풍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1860년 후반부터 불화의 길을 걸었던 금호 스님은 83세로 입적하기 4년 전인 1924년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마곡사 심검당 석가모니불화’ 〈사진〉를 비롯해 ‘서산 부석사 칠성도’, ‘예산 향천사 괘불’ 작업에 참여할 만큼 화원으로서의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다.

금호 스님이 이토록 입적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은 데에는 불화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열정은 세속의 열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부처님을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이어야 하기에 계정혜를 닦지 않으면 안되는 것. 금호 스님은 붓의 기법 뿐 아니라 수행정진에도 남다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금호 스님은 언제나 성내는 일이 없고 남의 시비를 말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든 늘 겸손하게 대했다.

20세 전의 사미에게도 반드시 경어를 씀은 물론 인사할 때도 맞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어느날 대중공양을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80이 넘어 요통이 있어 맞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이제 나에게 조석문안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절을 받으시더라도 앉아서 받으시고 맞절은 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내 마음이 허락지 않습니다.”

83세 되던 해 어느 날 사중에서 사용하던 상여를 깨끗이 닦아 새로 단청해 놓으라 이른 뒤 상중에 쓸 비용을 마련해 조목조목 몫을 정한 후 삼직 스님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후 대웅보전에서 천불전으로 건너는 다리를 보았다. 그 다리는 금호 스님이 출자해 마련한 것. 그 전의 다리는 홍수로 떠내려가고 없었다. 이 다리를 지켜보던 중 피로가 와 방으로 든 후 열반에 들었다. 이 때가 1928년 7월. 고요한 도량에 맑은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8일 동안 방광 현상이 이어졌다고 한다.

50여년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130여명에 이르는 많은 화승들과 함께 불화를 그린 금호 스님 문하에는 법융, 문성, 상옥, 정연, 목우 등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전반 충청지역 불화계를 이끌었던 많은 제자들이 배출됐다.

법융과 상옥이 금호 스님과 함께 불화를 제작했지만 수화로서의 일가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연, 문성 스님은 금호 스님이 입적한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불화양식을 계승했다.

<사진설명>마곡사 심검당 석가모니 탱화.

정연 스님의 작품 중에서는 법주사 원통보전 관음보살도가 손꼽힌다. 정연 스님이 출초한 이 작품은 의겸(義兼)에 의해 완성된 조선후기 관음보살도의 전통을 이은 천여(天如)의 ‘선암사 항로암 관음보살도’와 유사한 도상을 보여 호남지역의 화승들과도 교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정연 스님이 출초한 ‘고산사 석가모니불화’에서도 인체의 사실적 표현, 뾰족한 육계와 정상계주,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의 양식은 금호 스님의 화풍을 잘 계승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금호 스님의 불화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화승은 근대불화의 초석을 마려했다고 평가받는 보응 문성(普應 文性)이다.  

사진제공 = 성보문화재연구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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