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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畵僧들][5] 금용 일섭 상

기자명 법보신문

살기 위해 어린나이 출가
쇠잔한 근대 불교미술 중흥

<사진설명>상계사 대웅전 삼세불탱(석가모니불.1923년)

19세기와 20세기의 불화 전통 가교 역할을 한 화승을 한 분 꼽으라면 단연 금용 일섭(金蓉 日燮)스님이다.

금호 약효, 보응 문성의 맥을 이은 금용 스님은 마곡사를 중심으로 한 호서불화계는 물론 선암사 쾌윤(快允), 송광사 의겸(儀謙)과도 함께 일하며 호남 불화계의 숨결 까지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준 화승이다. 더욱이 불화뿐 아니라 개금, 단청, 조각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일섭 스님이 있었기에 쇠잔해 가던 근대불교미술이 중흥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응문성의 수제자

금용 스님은 1900년 12월 전남 화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갑병’(甲炳). 어린 갑병은 전쟁부터 불가와 인연을 맺어야 하는 운명이었을까? 갑병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불문에 들어야 장수한다’는 말을 누누이 들었다. 이에 부모는 아들의 단명을 막기 위해 ‘수연’(壽延)이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고, 급기야 14살 때 송광사로 출가시켰다.

세연의 연장을 위해 어쩔 수없이 불문에 들어선 금용 스님은 당시 송광사 화원으로 주석했던 봉린 스님을 만나 불화와의 첫 인연을 맺었다. 19살부터 예수재용 인물 화초를 그렸던 스님은 얼마 안가 봉린 스님으로부터 그림 재주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23세 때인 1922년부터 습화작업을 위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며 많은 화승을 만나게 되는데 서울 청련사에서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스님이 바로 보응 문성 스님이다.

보응 스님과 인연을 맺은 그 해에 인천 능인교당의 ‘칠성 산신 신장탱화’를 보응 스님과 함께 작업하고, 천안 성불사 불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아 이미 화원으로서의 수승한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여천 흥국사 삼세불’, ‘공주 갑사 후불탱과 신중도’, ‘밀양 표충사 104위 신중도’ 등은 모두 20대 초반 작품이다. 20대 후반에는 불화조성은 물론, 단청과 개금불사, 각 사당의 존상, 수운교천단의 단청및 종교화 등 타종교화까지 그리며 명성을 떨쳤다.

처음 불화를 배운 봉린 스님과 함께 그린 ‘송광사 성산각 칠성도’(1925년)〈사진〉는 금용 스님의 후작과 매우 비교되는 작품이어서 주목된다.

중앙 치성광여래는 한눈에 보아도 일반적인 여래와는 사뭇 다르다. 정수리 부분이 민머리로 되어 있어 언뜻 보면 민머리에 검은 머리띠를 두른듯한 인상이다. 이러한 도상은 보응 문성 스님의 작품에도 간혹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권속들의 모습과 색감이다. 화면 상하단에 서있는 칠원성군은 각각 네명씩의 천동천녀를 거느리고 있는데 얼굴 형태와 전체적인 색감이 치성광여래와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연유로 이러한 탱화가 조성됐는지는 좀 더 연구해 보아야 알겠지만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봉린, 보응의 화풍 속에서 금용 자신만의 독특한 인물 표현을 구사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 작품에서는 이러한 상반된 형상과 색감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용 일섭 스님의 스승인 보응 문성 스님과 함께 한 초기작품은 어떠한가.

30대에 접어들며 조성한 ‘갑사 대성암 석가모니후불탱화’(1930년)〈사진〉를 보면 서서히 금용 스님의 화풍이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 탱화의 포인트는 석가모니불의 두광을 둘러싼 채운. 광배 주위를 둘러싸는 이러한 구름 표현은 이후에도 다수 작품에서 나타난다.

또한 본존불을 비롯한 좌우협시보살들이 상호를 보면 작으면서도 옆으로 약간 길게 늘어진 얇은 눈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이는 십대제자나 사천왕과 같은 다른 권속들의 눈 표현과 대조적이다.

봉린 스님과 함께 작업한 ‘송광사 성산각 칠성도’에서 본존불과 권속의 모습이 대조적이면서 동떨어진 느낌을 주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본존불과 십대제자 등의 다른 인물들과의 대조성은 전체적으로 조화된 모습이다.

독특한 상호 표현법 완성

석가모니가 앉은 연화대좌 아래로 채운이 감돌고 연꽃줄기가 대좌를 받들고 있는듯한 표현도 일품이다. 인천 시립박물관 신은미 학예사는 “이러한 표현은 정련,보응, 만총 스님이 함께 제작한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화〈사진〉에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평했다.

금용 스님의 30대 후반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금용 스님의 인물표현 기법을 알아보자. 불화를 이루는 여러 요소 중 부처님과 보살, 동자들의 상호는 작품 완성도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물 각각의 움직임과 자세까지도 표현할 만큼 세심한 인물묘사를 강조했던 스님은 “삼비오안(三鼻五眼)은 부처님의 얼굴을 그리는 원칙으로 얼굴의 길이가 코 길이의 세 갑절이며 넓이는 눈매 길이의 다섯 배 이며, 신장은 얼굴의 육배 반”이라며 인물묘사의 원칙을 설명한 바 있다.

신은미 학예사가 자신의 논문 ‘화승 김일섭의 불화 연구’를 통해 분석한 금용 스님의 인물 표현기법을 보자.

<사진설명>송광사 성산각 칠성탱.1925년(좌) 갑사 대성암 석가모니 후불탱.1930년(우).

“금용 스님의 작품 인물 특징 중 하나는 본존 및 주위 보살의 얼굴표현에 있어서 위로 약간 올라간 가는 눈이다. ‘갑사 대자암 석가모니후불도’나 ‘금산사 칠성도’에서 보이듯 이러한 눈의 표현은 본존과 양협시보살의 둥글고 평평한 얼굴을 더욱 강조시켜주고 있다. 이외에 좌우 협시보살의 얼굴 표현에 있어 눈 밑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푼 듯한 돌출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특징은 측면향의 인물표현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으로 남원 선원사 괘불의 협시보살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금용 스님은 항상 많은 화우와 후배제자들과 함께 불사에 임했다고 한다. 혹, 불사중에 화원이 찾아오면 적은 일이라도 동참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일이 끝나 떠날 때는 보시를 원만하게 나눠주어 화원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불사를 임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개념치 않았다. 언젠가 목조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는데 기존의 조각칼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직접 재료를 구해 손수 여러 종류의 조각칼을 만들어 썼다. 단청을 맡아 일 할 때 화원이 부족하면 손수 비게도 매고 청토도 칠하는 등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사진제공 = 성보문화재연구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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