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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구제 위한 ‘파계’ 오명조차 감내

기자명 법보신문
  • 인욕
  • 입력 2007.01.17 09:27
  • 댓글 0

근현대 큰 스님들의 인욕 발자취

나병 여인 보살피다 젊은 수좌들에 봉변 당하기도
하심하며 묵묵히 수행-제도하는 자비행의 밑거름

“노승이 객실 한 칸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빈 객실이 없는데. 딴 데로 가시지요.”

아무리 먹고살기 힘든 식민국가의 백성들이라지만 노승을 대하는 절집안의 인심이 이리 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곳은 조선팔도 최고의 명산 금강산에서도 대찰로 손꼽히는 장안사가 아니던다. 하지만 노승은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물러서더니 “어디 바위굴 틈에서라도 하룻밤 지내자”며 잠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꼴을 보다 못해 육당 최남선이 장안사 종무소로 뛰어들었다.

“바로 저 노스님이 조선불교 교정이신데, 세상에 객실 한 칸 없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 있소?”

장안사가 발칵 뒤집어지고 사중 스님들이 모두 뛰어나와 허둥지둥 노스님을 안으로 모셨다.

“스님, 뉘시라고 말씀을 해주셨으면 이런 무례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황송하고 억울한 듯 변명을 하는 스님들께 노스님,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머금고 답한다.

“공무로 온 것도 아니고 금강산 유람이나 하러 왔는데 굳이 교정이라고 밝혀 폐를 끼칠 이유가 있겠는가. 괜찮으이.”

조선불교 최고의 어른이 풍찬노숙을 할 뻔했던 이 사건의 주인공은 한영(1870~1948) 스님이다. 스님은 조선불교 최고의 지도자였던 교정이자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인재를 양성해온 큰스님이었지만 겸손하고 하심하기가 이와 같았다.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인 육바라밀의 인욕(忍辱)은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의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지만 특히 수행자에게는 ‘욕됨을 참는다’는 하심의 의미로도 강조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대승의 큰 가르침은 출가 수행자들에게 중생 교화와 구제를 위한 인욕행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불교 근대사를 이끌어온 큰스님들의 행적에서는 유독 인욕바라밀이 두드러진다.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첫손에 꼽히는 경허(1849~1913) 스님은 이러한 수행과 중생구제의 깊은 인욕행을 몸소 보여준 대선사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던 어느 해 겨울 유난히 추운 날 밤, 보자기로 얼굴을 뒤집어쓴 젊은 아낙이 경허 스님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스님은 이 여인과 며칠 동안을 한방에 기거하며 겸상으로 공양까지 하는 것이었다. 일체 외부인의 출입을 물린 채 여인과 한 방에 기거하는 경허 스님의 모습에 시자였던 만공 스님마저 만류하고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소식이 해인사에 퍼지자 사중의 젊은 수행자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큰 스님이라지만 여자까지…. 너무하지 않는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해인사의 젊은 수행자들은 결국 경허 스님의 방으로 몰려왔다.

“스님, 이제 여자를 그만 내치시지요. 여자를 내쫓지 않으면 부득불 스님께서 나가주셔야 겠습니다.”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들 앞에서 스님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젊은 아낙이 얼굴을 감싼 보자기를 풀러 내렸다. 아낙은 얼굴이 온통 피고름으로 뒤덮인 나병 환자였다. 당황하는 이들에게 아낙은 울며 말했다.

“큰스님께서 따뜻한 방에 재워주시고, 따뜻한 밥 먹여주시고, 고름까지 닦아주셨으니 곧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경허 스님은 자신에게 쏟아질 온갖 비난을 다 받으면서도 오갈 곳 없는 나병 환자를 돌본 것이다. 출가자로서의 근본까지 의심받으며 남을 위해 희생한 경허 스님의 이같은 자비행이야말로 인욕행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경허 스님의 애제자이자 근세 한국불교의 버팀목이었던 만공(1871~1946) 스님도 스승 못지않게 많은 인욕행을 실천한 큰스님이다.

출가한 아들이 조선팔도에 유명한 큰스님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노모를 만공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 모시고 손수 머리를 깎아 드린 후 원만(圓滿)이라는 법명까지 지어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견성암의 비구니 스님 둘이 다급하게 만공 스님을 찾아왔다.

“원만 스님이 공양미를 훔쳐 아랫마을로 향하는 모습을 봤다는 이가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의심을 버릴 수 없었지만 두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의 말에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두 비구니 스님이 만공 스님을 다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간밤에 원만 스님을 따라 가보니 아랫마을의 가난한 집에 공양미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이미 마을에는 가난한 집에 공양미를 나눠주는 스님의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만공 스님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큰스님들 중에는 구도의 일념으로 솥을 아홉 번 고쳐달았다는 구정(九鼎) 스님의 이야기와 같이 수행을 위해 끝없는 인욕행을 이어온 분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게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인욕제일’이라 불렸던 청담(1902~1971) 스님이다. 청담 스님은 속가에 늙은 홀어머니와 아내, 딸 하나를 남겨두고 출가의 길을 걸었다. 어느 날 스님을 찾아온 노모가 다짜고짜 스님의 손을 잡고 속가로 끌고 와서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딸자식 하나 남겨두고 출가길에 나섰으니 이 집안은 대가 끊기게 생겼다. 제발 부탁이니 대를 이을 씨 하나만 남기고 가다오.”

눈물로 호소하며 절규하는 노모를 스님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뛰어든 목련존자를 떠올리며 청담 스님은 옛 부인이 머물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이튿날 새벽같이 속가를 떠난 스님은 “지옥에 갈 각오로 파계한 몸, 이정도 고통은 달게 받겠다”며 장장 10년의 세월동안 참회하는 마음으로 맨발 고행을 시작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오직 ‘구도’의 한 길만을 걸어간 청담 스님의 행적에는 발바닥이 찢기고 짓이겨지는 인욕의 고행이 있었다.

사람들은 “길가에 피에 물든 발자국이 있다면 청담 스님이 방금 그 길을 지나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했을 정도로 스님의 고행은 처절하고 냉혹했다.

절규하는 노모를 위해 ‘파계’라는 욕됨을 마다하지 않았던 청담 스님의 자비행에는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참다운 보살의 인욕행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현대 한국불교를 밝게 빛낸 큰스님들의 삶 속에는 철저한 인욕의 행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는 정법을 구하고자 정진하고 있는 오늘날의 출·재가 수행자들에게 수행하는 이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의 기본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고승열전』의 저자 윤청광 씨는 “인욕은 ‘일시적인 고통을 참는’ 인내보다도 더 크고 포괄적인 개념”이라며 “이 시대의 불자들이 과거 큰스님들의 인욕행을 통해 참고 견뎌내는 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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