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옹혜근 스님
23 나옹혜근 스님
  • 법보신문
  • 승인 2007.02.0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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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 옷 한벌 지팡이 하나로 ‘無念의 곳’에 이르렀네

보제존자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고 입적해서는 ‘전설’이 된 고승이다. 그 분이 남긴 시들은 여전히 대중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로 스님이 직접 쓴 발원문과 많은 게송들은 조석으로 스님들에 의해 암송되며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신화’는 고려말 격동과 수난의 회오리에 맞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으로 일관되게 살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1320년 지금의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임신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세금의 수탈에 못 이겨 아버지가 집을 떠난 가운데 어머니가 관리한테 끌려가던 중 그를 낳자 까치들이 보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미 7세에 서역의 고승 지공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스님은 20세가 되어 출가를 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문경 묘적암에서 요연 선사를 은사로 “삼계고해에서 해탈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각오로 입산한 스님은 몇 해 뒤 양주 회암사로 옮겨 4년간의 처절한 정진 끝에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은 이후 원나라로 건너가 지공 선사와 평산처림 선사 등을 만나 법거량을 한 후 인가를 받았다. 지공 스님은 “눈 밝은 법왕에게 천검을 준다”며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임제의 법맥을 잇는 평산처림 선사도 “계법이 청정하여 보리를 얻었고 선정과 혜광을 다 구족하도다”라며 불자와 법의를 전하기도 했다.

중국 황제까지도 찬탄을 마지않았던 나옹 스님이 10년간의 중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39세 때인 1358년. “스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도 불법에서 물러나리라”는 공민왕의 간곡한 요청에 신광사에 머물었고, 홍건적의 침입 때 의연한 태도로 절에 남아 적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기도 했다. 2년간 신광사에 머물던 스님은 결국 왕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산천을 주유하며 인연 따라 법을 설했으며 1370년 공부선(工夫禪)을 베풀어 꺼져가는 법등을 살리려고 애쓰기도 했다.

특히 만년에는 회암사 중창에 온 전력을 기울였고, 1376년 5월 15일 성리학으로 무장한 중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밀양 영원사로 추방되던 중 신륵사에서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지으리라”며 시적(示寂)했다. 이때 오색 구름이 산을 덮었고 수많은 사리가 나와 이를 씻을 때 구름도 없이 그곳에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스님에 관해서는 입적 때의 상서로운 일들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묘적암에 계실 때 멀리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알고 냇가의 물을 손으로 떠 허공으로 날려 보내 불을 껐다거나,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을 꾸짖어 칡넝쿨이 세 자 이상 크지 못하게 했다는 등 신통력에 대한 얘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로 등장했던 이유나 스님의 사리와 진영이 일본·중국에 전해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로 신통력이 대단하셨나요?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게 기적이 아니라네. 부처님 말씀처럼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는 게 참다운 기적이지. 나는 신통력이 없다네. 그저 진리와 정직을 신통력으로 삼을 뿐이지.”

▷스님께서는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셨습니다. 그런데 회암사에서 주관하신 법회에 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여 관리를 보내 막게 하고 추방까지 시켰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기울어져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네만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지. 유교이념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이들에게 나는 그들의 계획과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던 게지. 특히 회암사는 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불교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으니까. 안타까운 일이지.”

▷스님의 입적은 고려불교의 패배이자 불교의 몰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불교는 급속히 힘을 잃어갔고, 결국 500년의 불교탄압으로 이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스님이 백성을 미혹시켜, 천승(임금)조차 필부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게 하고 급기야 유교를 약화시켰고, 이에 주살했다는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혹시 스님께서는 살해되신 것은 아닌지요?

“오랜 세월 불교가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부귀영화에 탐착해온 공동의 업이지. 이제와 시비를 가리고, 누굴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쓰면 될 일이지.”

▷신광사에 주석하실 때 홍건적들로 인해 모두 피난을 갔지만 끝까지 절을  지키셨습니다.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는 그들 사이에 홀로 남은 건 지나치게 생명을 경시한 태도는 아니셨는지요?

“삶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살 만한 명이 있으면 살 것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저승사자는 꼭 그들만이 아니네. 어디에 숨든 세월이라는 저승사자를 피할 도리는 없으니까 말일세. 부처님께서는 99명을 살해한 앙굴리말라를 일부러 찾아가 교화하지 않으셨는가. 아무리 홍건적이라도 불성이 없겠나. 내게 그들은 진리를 몰라 헤매고 있는 교화의 대상이었네.”

▷일설에는 스님의 누이동생이 절에 와서 게으름을 피우고 정진도 하지 않자 불러 게으른 이유를 묻자 “오라버니가 훌륭한 스님이니까 저도 극락에 가겠지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다음날 누이를 불러 놓고 혼자서만 맛있는 떡을 드시자 누이가 “아니 맛있는 떡을 왜 혼자 드십니까?” 하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거, 이상하다. 내가 떡을 먹었는데 왜 너의 배가 안 부르지”하고 경책했다고 전합니다. 사실인가요?

“허, 그런 얘기가 있나. 누이동생은 내가 출가한 후 나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지. 그러나 출가자에게 속가란 뜬구름 같은 것 아니겠나. 착하디착한 누이가 나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부디 아미타불을 늘 염송해 참다운 행복을 찾고 극락왕생하길 간곡하게 당부했을 뿐이라네.”

▷스님께서는 겹겹이 기운 누더기 옷을 일컫는 ‘백납가(百衲歌)’를 비롯해 소박함을 무척 강조하고 계십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춥고 배고픔을 멀리하면 도(道) 또한 멀어지네. 투철한 수행정신과 공의 체현이 소박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지. 고려말의 불교가 타락하고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가난과 고독을 싫어해서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당당한 수행자의 누더기 옷이야말로 진리 가풍을 잇는 참다운 신표일세.”

▷스님께서 쓰신 많은 글들이 남아있는데 선시야 그렇다 하더라도 가사문학의 효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말로도 여러 편의 글을 쓰셨습니다. 평소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단박 깨침을 강조하면서도 염불 또한 성불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만 고집하면 그 순간 불법이 아니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네. 다만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네. 심성을 울리고 변화토록 하는 것이 ‘이해’이니, 보다 많은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려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국가승려고시인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제시하기도 하셨는데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흔히 다름에 관심을 갖는다네. 뛰어난 사람은 ‘천재’나 ‘성인’이라 부르며 남의 일로 취급하고 나와 다르게 보는 거지. 하지만 공부는 당당함과 다르지 않음에서 시작된다네. 달마도 임제도 눈은 가로 찢어지고 코는 솟았으며, 그대들도 눈은 가로 찢어지고 코는 솟았네. 삼라만상의 주인이 바로 그대란 말일세.”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내가 ‘경세(警世)’라는 시에서 말했듯 백년도 잠깐 동안인데 세월을 소홀히 보내지 말게나. 노력하고 수행하면 부처되기 쉽지만 금생을 잘못 보내면 벗어나기 어렵네. 죽음이 홀연히 오면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부처나 영웅을 좇지 말고 그대들 스스로 부처나 영웅이 되려하게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종범 스님 「나옹선풍과 조선불교」, 효탄 스님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 연구』·「나옹혜근의 불교사적 위치」, 윤태현 「나옹 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이병욱 「나옹화상 귀양과 죽음에 대한 의문」, 김윤곤 「나옹 혜근의 회암사 중창과 반불론의 제압기도」, 이봉춘 「암울기의 눈 밝은 생애」, 한기두 「나옹의 중심사상과 선풍」, 이종찬 「가송의 대가 나옹」, 인권환 「나옹왕사 혜근의 사상과 문학」, 고혜령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사상적 만남」, 조동일 「전설의 형성과 의미, 나옹전설의 경우」 등


나옹 어록

“만일 그대가 이 일을 궁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승속에도 있지 않고 남녀에도 관계 없으며 초참 후학에도 관계없고 또 여러 생의 구습에도 있지 않는 것이오. 오직 당자의 한 생각의 진실한 결정적인 믿음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미 그렇게 믿었거든 다만 24시간 동안 언제나 화두를 드시오. (그러다보면 반드시) 잠자코 스스로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오.” (나옹집 중)

‘산하대지가 눈앞의 헛그림자요 만상삼라도 또한 그러하다. 자성이 원래 청정함을 알면 하나하나 모든 것이 법왕신이로다./ 못 깨달으면 산하는 내가 아니요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한 몸이로다. 깨닫고 못 깨달음 모두 부수면 새벽마다 닭은 오경에 운다.’ (나옹집 중)

‘한 생각 잊을 때 밝음 나타나/ 아미타불 다른 곳에 있지 않나니/ 온 몸이 앉거나 눕거나 바로 연화국이니/ 어느 곳 극락당 아닌 데 어디 있으리./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이를 얻어 부디 잊지 말아라/ 생각이 다하여 무념(無念)의 곳 이르면/ 네 몸에서 부처의 빛 절로 일리라.’ (나옹집 중)

‘해진 옷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 천하를 횡행해도 걸릴 데 없네/ 강호를 돌아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가/ 원래로 다만 배운 것 빈궁뿐이네.’
 (나옹집 백납가 중)


찬탄과 공경

“보제(나옹) 스님은 우리 선왕이 스승으로 삼았던 분이다. 도가 높고 덕이 높으매 온 나라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그 바람이 불어가는 아래 나아가 법문을 들음으로써 일생의 다행으로 여기지 아니함이 있으리요.”
 (고려 목은 이색)

“지공의 천검과 평산의 할이여/ 공부를 선택함은 어전에서 있었도다./ 최후의 신광으로 사리를 남기니/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을 전하도다.”
 (제자 무학자초 스님)

“한국불교에 주어진 현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불교문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옹의 종풍에 그 기준을 두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옹종풍은 그야말로 ‘체용겸전(體用兼全·大機大用)’의 종풍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나옹은 선사이면서 발원문을 지어 발원했고, 염불행을 선으로 회통되도록 게송을 지어 설시하는 등 오증법력·자비방편·신기서광을 함께 갖춘 선풍이 나옹선풍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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