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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입춘과 차

기자명 법보신문

일조량-환경이 만드는 생기 넘치는 차

온화(穩和)해진 햇살이 살갑다. 서걱 서걱대던 바람결도 한결 무디어졌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간혹 띠는 입춘방(立春榜)이 눈에 어설프다. 거거년(去去年)전만해도 글깨나 한다는 한양(漢陽)의 명문가(名門家), 자손(子孫)의 문필(文筆)을 자랑삼아 걸던 것이 입춘방이 아니던가! 추사 김정희선생의 비범(非凡)한 문재(文才)가 세상에 드러났던 건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방(立春榜) 큰 글씨를 문 앞에 걸었던 탓이었다.

입춘(立春)! 이미 봄의 화신(花信)이 가까이 온 것이다.

며칠 전, 승주 차 밭에서 전화가 왔다. 대밭을 관리할 인부 몇 사람을 사야하니 비용(費用)을 보내란다. 벌써 차나무 관리가 시작되었구나. 내 마음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이맘때가 되면 산간 지역의 죽로차(竹露茶)산지에서는 묵은 대를 잘라내고 새 대를 간목(間木)으로 세우기도 하고 빽빽해진 대나무를 잘라 간벌(間伐)을 시작한다. 새 대나무의 싱싱한 기상을 살려서 좋고, 빽빽하게 우거져 짙은 그늘이 생기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짙은 그늘에서 자란 차 잎은 색과 향, 맛도 무거워진다. 언뜻언뜻 대나무사이로 햇살을 받게 하여 양기를 적당히 머금고 자란 차 잎에선 시원하고 맑은 청향(淸香)이 핀다. 차 잎을 따 놓은 바구니에서 상큼한 차향이 피어나면 정수리에 시원한 바람이 인다. 구수한 생잎의 향기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이것은 적당한 일조량과 경쾌한 자연 환경에서 자란 차 잎이 품어내는 자연의 생기(生氣)이다. 훌륭한 제다(製茶)란 자연(自然)을 품은 차 잎의 원형(原形)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이다. 차가 지닌 고상한 기운은 중도(中度)를 잃은 사람들의 욕망을 거부한다. 차를 만드는 일은 차 잎의 자연(自然)적인 기운을 겸허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며, 중도를 잃지 않아야한다. 제다인(製茶人)이 수행력을 갖추어야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실 누대(累代)에 걸쳐 기록된 다서(茶書)에 어김없이 열거된 제다(製茶), 품천(品泉)이나 탕법(湯法),다구(茶具), 차를 잘 갈무리하는 일 등의 논의(論議)는 어떻게 하면 차가 품고 있는 자연의 기운(현대적인 의미로는 차의 미세한 성분)을 잘 들어냄을 탐구(探究)한 것이다. 대략 이런 조건들을 갖출 때 차에 숨겨진 진귀한 보물을 완미(玩味)할 수 있다. 물론 한층 더 높은 경지는 차의 기(氣)를 잘 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나무의 생육환경 중에 깊은 산 계곡에서 자란 차를 으뜸으로 치는 이유는 분명하다.

또 중요한 것은 채다(採茶)의 정밀성을 위해 미리 차밭을 관리해 두는 일이다. 가시나무와 딸기나무 등, 지난 해 자라 난 크고 작은 잡목을 제거해야한다. 자연 상태에서 자란 차나무 사이사이에는 잡목(雜木)이 무성(茂盛)하다. 설령 잡목을 헤집고 들어 가 차를 딴다한들 차를 따는 사람의 손이나 다리에 상처를 입히기 쉽고 마음마저 조급해져 정성을 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차 잎에 상처를 내지 않고 손톱만을 이용하여 차를 딸만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은 차 잎에 행여 상처라도 생기면 산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차나무 사이를 듬성듬성 잘라내어 바람이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 지나가도록 해 주어야한다.

차나무는 바람결이 스치며 속삭이는 따뜻한 숨결을 좋아한다. 아마 하늘과 땅의 은밀한 소식(消息), 바람을 통해 듣는가보다. 이 봄에 튼실한 차 싹이 피우는 건 아마도 바람의 따뜻한 후원(後援)덕분이리라.

동아시아 차 문화 연구소 소장 dongasiac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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