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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발해 정효공주

기자명 법보신문

무너진 발해 무덤탑서 발견된 비운의 여인

남편-딸 먼저 보내고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요절
발해문왕의 넷째딸…거대한 불탑으로 무덤 조성

1980년, 길림성 화룡면 용두산 기슭에서 소꼴을 먹이고 있던 한 학생이 특이하게 생긴 벽돌 무더기를 발견했다. 거의 다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벽돌에 새겨진 정교한 연화문양들이나 웅장한 규모는 이 무더기가 단순한 벽돌더미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필시 ‘심상치 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흔적임이 어린 학생의 눈에도 직감적으로 전해진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운동으로 인해 시골로 보내졌던 이 눈 밝은 학생의 보고로 연변박물관은 이 무너진 탑의 조사에 즉시 착수했다. 부서진 벽돌들을 모두 거둬내자 지하에 커다란 무덤이 드러났다. 무덤에는 두 사람의 유골과 함께 금속 장신구 등이 안장되어 있었다.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묘지명은 이 무덤의 주인이 발해 제3대왕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757∼792)와 그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효공주의 무덤탑은 발해에 여인불자가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긴 세월동안 잊혀 있던 발해라는 방대한 제국의 실체를 알려주는 단서들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정효공주 묘지명에는 그녀의 짧은 삶이 ‘매우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되어 있다. 묘지명은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유순하고 용모가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고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한나라의 여류시인 반소의 시를 좋아하고 예악을 즐겼으며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정효공주를 묘사하고 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 여인은 장성한 후 훌륭한 군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소루 위에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 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 가운데 한 쌍의 난조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명문은 전한다.

정효공주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에 겨웠던 결혼생활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젖먹이 어린 딸마저 죽어버렸으니, 부러울 것이라곤 없을 것 같았던 여인의 운명은 일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묘지명에는 실패조차 갖고 놀지 못하던 어린 딸의 빈 방을 바라보며 공주가 한숨을 몰아쉬곤 했다고 쓰여 있다. 남편에 이어 어린 딸마저 잃어버린 상심이 얼마나 깊었던지 몇 해 뒤 그녀 또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정효공주 무덤탑’은 그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딸을 앞서 보낸 아버지 문왕이 가련한 딸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정효공주 무덤탑의 묘비명은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의 슬픔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의 넷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황상은 조회마저 중지하고 몹시 비통해 하며 침식을 잊고 춤과 노래를 중지시켰다. 조상을 치루는 의식은 관부에 명령하여 빈틈없이 마련하였다.”

현재 정효공주의 무덤탑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다. 다만 무덤탑 기초의 면적이 22.3평방미터가 되어 ‘마적달탑’이나 ‘령광탑’보다 훨씬 더 웅장한 규모로 조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공주의 무덤을 이토록 성대하게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문왕의 치세 기간 동안 발해의 국력이 상당히 강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보다 앞서 간 딸을 기리는 부성이 그만큼 절절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발해를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성장시킨 무소불위의 황제였지만 죽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탑을 세운 공덕으로 딸이 좋은 곳으로 가길 부처님께 비는 일밖에 없었다. 또한 불심 깊었던 딸의 무덤을 거대한 탑으로 조성함으로써,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되기를 발원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 아버지의 딸을 향한 처연한 마음은 무덤위 벽돌 빛깔의 수선화로 피어났고, 그들의 설운 사연은 탑의 명문으로 살아남아 오늘날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세상에 되살리는 단서가 되었으니, 이 모두가 천년 간극의 시공을 넘나드는 지극한 불연(佛緣)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발해의 정효공주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중국 변방의 공주로 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고대 한국의 공주로 보는 것이 타당할까. 당연히 한국의 공주라 믿고 싶은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동북아시아사를 둘러싼 역사논쟁은 발해라는 나라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원한, 그리고 감상적인 꿈을 가차 없이 짓밟고 있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는 물론이요,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국의 역사로 귀속시키기 위한 역사 각색 작업을 수년째 진행 중이다.

수천 년 간 동북지역을 동쪽 오랑캐의 땅으로 간주해온 중국이 갑자기 “현재 중국 영토에 귀속된 지역의 역사 또한 중국역사”라는 주장을 한 배경에는 중국 주변부의 탈(脫)중국화 추세에 대한 경계심이 도사리고 있다. ‘동북공정’의 이면에는 90년대 이후 사회주의를 대신하는 통합 이데올로기로써 내세워진 ‘중화민족주의’와 함께 21세기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발해와 통일신라를 남북국 시대로 바라보며, 발해의 역사를 한국의 일부로 인식해온 ‘고구려 후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효공주의 무덤탑은 그런 논쟁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덤에서 발견되는 여러 요소가 다른 발해의 고분이나 탑 양식과는 달리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둘째 언니인 정혜공주의 무덤이 고구려 양식인 석실봉토분 즉 판석을 이용해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마련한 뒤 봉토를 씌운 무덤인 반면 정효공주의 무덤은 재료가 벽돌인데다 지하에 무덤칸을 만들어 기본적으로 중국 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 무덤 위에 탑을 쌓은 형태가 당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며, 12명의 인물 벽화 또한 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미술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녀의 무덤에는 또 다른 중요한 열쇠가 담겨 있다. 바로 묘지명에 등장하는 그녀의 아버지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으로 칭하는 것과 아울러 그를 황상(皇上)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은 문왕대의 연호(年號)이고, ‘금륜성법(金輪聖法)’은 문왕이 정복군주로서 천하에 정법(正法)을 시행하는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임을 상징한다. 이는 발해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불교였으며, 문왕이 호법(護法)의 군주였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또 발해인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왕을 황상이라 불렀다 함은 당시 발해가 중국에 대해 스스로 천자임을 자처하는 독립국이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문왕은 일본에 보내는 조서에서 ‘천손(天孫)’이라 자칭할 정도로 ‘독립국가의 군주’라는 의식이 강한 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건국한 나라인 동시에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말갈민들의 나라였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역사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 그리고 여진족과 몽골족 등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수천 년 동안 함께 만들어낸 공업(共業)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역사는 결코 중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포함될 수 없으며, 동시에 우리 한민족만이 일구어낸 결과물도 아니다.

자기 민족 혹은 자기 문화에 대한 강조는 ‘대립’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것’을 강조하는 순간 우리는 중국이 만들어낸 신제국주의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효공주의 무덤탑은 동북아시아의 문화가 중국의 것도 한국의 것도 아닌 ‘그들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고목이 무성하고 들판에 연기가 자욱한데,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처량한 감정이 홀연히 쌓이는구나.”

정효공주 묘지명의 마지막 구절은 닫혀졌던 발해의 역사를 열어가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처럼 애처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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