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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敎 선풍 일으킨 홍인의 동산법문 성성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5. 오조사(五祖寺)

<사진설명>선종사찰순례단이 오조사 입구 좌우 문 위에 걸린 신수 스님과 육조 혜능 스님의 게송을 바라보고 있다.

호북성 황매현 시내와 쌍봉산을 잇는 길에서 4조 도신 스님을 만나 동진 출가하여 중국선종의 법을 이은 홍인(601∼674) 스님. 일곱 살 때 도신 스님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의 성 씨가 ‘불성’이라고 했을 정도로 남달랐던 홍인 스님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기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주 씨 성을 썼다.

‘불법을 깨쳐 널리 펴 보이겠다’는 전생발원을 인연으로 남다르게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홍인은 법을 이어 받은 후, 전생발원을 실현하고자 쌍봉산을 내려와 황매현 동쪽의 빙모산으로 자리를 옮겨 654년에 빙모산 백련봉에 오늘날의 오조사가 된 선정사를 건립했다. 이에 따라 4조와 5조가 같은 황매현에서 나란히 법을 펴게 되었고, 세인들은 사조사를 황매현 서쪽에 있다해서 서산으로, 오조사를 황매현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산으로 불렀다.

중국 정부가 대대적 복원 불사

호북성, 안휘성, 강서성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한 오조사는 당 무종의 폐불정책 등으로 인해 흥망성쇄를 거듭하다가 당 선종 때 애초의 위치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자리에서 총림의 격을 갖췄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 스님들이 모두 쫓겨나고 전각이 소실돼 옛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의 모습은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복원불사를 지원해 갖춰졌으며 천왕전, 대웅보전, 비로전, 성모전, 조사전, 육조전 등이 주요전각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홍인 스님의 진신상이 파손된 후 유골과 사리를 수습해 새로 조성한 대만보탑.

마치 큰 성의 성문처럼 만들어진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을 돌아 뒤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성모전, 비로전, 그리고 진신전과 육조전으로 가는 문이 이어져 있다. 이곳 오조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전각 중의 하나가 성모전이다. 성모전은 홀몸으로 홍인 스님을 반듯하게 양육해 큰 스승이 될 수 있도록 했다는 점 때문에 후인들이 만들었고 내부에는 홍인 스님 모친의 상이 봉안돼 있다.‘성모’는 당 태종이 칙명으로 봉했고 중국에서도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로 잇닿아 있는 성모전과 비로전 옆쪽의 조덕(祖德)이라는 편액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혜능 스님이 방아를 찧으며 수행했던 자리임을 기념해 세워진 육조전으로 통한다. 육조전으로 향하는 회랑 양측 벽면에 그 유명한 신수 상좌와 혜능의 게송이 그림과 함께 새겨져 있어 순례객들로 하여금 옛 일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동산에서 법을 편 이래로 문인들에게 “자성이 청정한 본심을 알아야 하며 의연히 마음만 지킨다면 망념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홍인 스님은 어느날 문인들에게 “너희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면서 복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며 문인들의 가행정진을 독려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게송을 지어 올 것”을 명하며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가사와 법을 부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교수사로써 대중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수(神秀) 상좌가 야반삼경에 나와 벽에 게송을 써 놓았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 때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으며 수행 중이던 혜능도 이 소식을 들었다. 8개월 전 홍인 스님을 찾았을 때 “영남 사람이니 불성이 없다”는 말에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은 남북이 없다”고 반박했던 혜능은 읽고 쓸 줄 몰랐기에 한 동자를 앞세워 신수 상좌의 게송이 써 있는 반대편 벽에 자신이 말하는 게송을 쓰도록 했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두 게송을 다 읽어본 홍인 스님은 불법의 문 앞에까지 다다른 수행자의 견해를 보인 신수 상좌에게 더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혜능의 견처는 이미 문 안에 들어섰음을 알고, 삼경에 은밀히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하고 법을 전했다. 육조전으로 향하는 회랑에 이같은 과거의 일화를 그대로 옮긴 그림이 있고, 회랑 끝에 맞닿아 새로 지은 육조전에는 혜능이 방앗간에서 수행했음을 상징하는 방아가 놓여 있다.

다시 길을 돌아 나오면 진신전이 있고, 전각 내부에는 홍인 스님의 진신상을 모신 법우탑이 있다. 홍인 스님이 입적하기 1년 전에 제자들에게 지시해 지은 탑 안에 들어가 좌탈입망한 그대로 보존되던 진신상은 1927년에 대부분 훼손되었고, 문화혁명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진신상은 1985년 새롭게 조성했다.

신수·혜능의 선풍 깃들어

<사진설명>6조가 수행하던 오조사 방앗간.

진신전을 나와 산 위쪽으로 길을 잡으면 원오극근·태평혜근·용문청원 등 삼불로 추앙 받는 선사들이 법담을 나누던 다리라 하여 속칭 삼불교로 불리는 길상교가 놓여 있고, 길상교를 왼쪽으로 두고 대나무 숲길을 따라 산 위로 오르면 진신상이 파손된 후에 사리를 수습해 매장하고 새롭게 건립한 5조 대만보탑과 조사당이 있다. 대만보탑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홍인 스님과 제자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기반석을 볼 수 있고, 그 아래로 오조가 좌선하던 곳으로 알려진 2평 크기의 천연동굴 수법동이 있다. 수법동 안쪽의 천장에 오조의 수인이 조각돼 있으며, 이 수인에 손을 맞추면 복을 받는다는 설 때문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인 스님은 혜능에게 법을 전하기에 앞서 『금강경』을 설한 데서 볼 수 있듯, “오직 금강경을 수지하고 스스로 자성을 철견하면 곧 바로 성불은 성취되며, 사람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바로 성불한다”며 제자들에게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도록 했다. 따라서 달마에서 도신까지 이어져온 소의경전이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 바뀌었으며, 『금강경』은 혜능에게 전해진 이후 오늘날까지 선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 점진적 수행을 통해 대중의 신망을 얻고 있던 신수 상좌가 아니라 일자무식의 혜능에게 돈오의 선법을 전하면서 돈교(頓敎)의 선풍을 확립하는 등 이곳 오조사에서 선불교 역사에 특별한 이정표를 세웠다.

홍인 스님이 동산에서 설했던 동산법문의 사상은 “자심은 본래청정하고 불생불멸한 것이니, 그것을 진심으로 보고 지켜야 한다(守心)”는 수심요론(修心要論)이다. 수심(守心)이 모든 수행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호북성 황매현=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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