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風非幡 화두 낳은 혜능의 수계도량
非風非幡 화두 낳은 혜능의 수계도량
  • 법보신문
  • 승인 2007.04.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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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6. 광효사(光孝寺)·대감사(大鑑寺)

<사진설명>광효사는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도량이다. 중국 최초의 보리수와 의발탑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주창했던 육조 혜능(638∼713) 스님은 광동성 신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이 노씨 속명이 능이었던 혜능은 세 살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자라서는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혜능은 24세 되던 해 어느날 손님을 따라 갔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5조 홍인 화상이 『금강경』을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했다”는 손님의 말에 그날 밤으로 어머니가 홀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놓고는 오조를 찾아 황매로 떠났다.

15년 은둔 접고 전법 시작

이미 『금강경』의 한 구절에 깨달음이 있었던 혜능은 오조사 방앗간에서 8개월 동안 행자생활을 한 끝에 홍인 화상으로부터 법의 신표로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이 자리에서 홍인 화상은 “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원인의 땅에 결과가 저절로 난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므로 성품도 없고 남도 없다”는 게송으로 법을 전하면서 “더 이상 법의 신표로 의발을 전하지 말고 당분간 법을 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혜능의 법이 천하에 널리 펼쳐질 날을 기대하며 손수 나룻배의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다.

혜능이 떠나고 3일이 지나 신수 상좌를 추종하던 대중들이 오조의 법이 혜능에게 이어졌음을 알고는 의발을 뺏기 위해 혜능의 뒤를 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이들 가운데 혜명 상좌가 대유령 고개에서 혜능과 마주쳤다. 이에 혜능이 의발을 바위에 놓고 “가져가라”고 했으나, 의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혜명은 그때서야 혜능이 선지식임을 깨닫고 가르침을 청했다. 혜명은 여기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는 말에 깨닫고 혜능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처럼 혜능의 뒤를 던 다른 무리들의 발길까지 돌려놓고 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사진설명>광효사를 찾은 향객들이 향을 살라 조사의 덕을 찬탄하고 있다.

스승 홍인 조사의 부촉을 받은 이후 은둔생활을 하던 혜능은 15년 후 영남의 광동성 법성사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자 두 학인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하면서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혜능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며 마음의 도리를 일러주었다. 이 모습을 본 주지 인종법사가 자신의 자리를 내주며 혜능을 스승의 예로 대했다. 혜능이 아직 계를 받지 못했음을 밝히자 곧 원로대덕을 모시고 수계의식을 열어 혜능에게 계를 주었다.

이곳이 바로 행자 혜능의 삭발수계도량인 법성사, 오늘날의 광효사다. 그리고 앞서 깃발의 움직임을 놓고 벌였던 풍번문답은 비풍비번(非風非幡)의 화두가 됐다.

광효사는 광동성 광주시 광효로에 있다. 397년에서 420년 사이에 연차적으로 건립된 이 사찰은 중국에서는 영남불교의 총본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광주가 생기기 전에 광효사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사찰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 앞에 대웅보전이 있고, 대웅보전 뒤편으로 혜능 스님이 뒤늦게 삭발하고 계를 받았던 역사의 현장이 있다. 광효사 경내지의 한 가운데 정도가 될 대웅보전 뒤편에 자리잡은 8각 7층의 전탑이 혜능 스님의 삭발수계도량임을 상징하는 예발탑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탑 안에 혜능 스님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다고 자랑한다. 탑 앞의 표지석에는 예발탑을 소리내어 읽을 때는 의발탑(依發塔)으로 읽는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의발탑·中 첫 보리수 남아

의발탑 옆으로는 달마에 앞서 중국에 왔던 인도 승려 지략삼장이 502년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중국 최초의 보리수가 있다. 당시 보리수를 심은 지략삼장은 “향후 170년이 지나 이 나무아래에서 육신보살이 계를 받고, 최상승의 법을 설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웅보전 왼쪽으로 당나라 때 세운 서철탑이 있다. 당나라 시대에 건립한 천불천탑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의 탑만이 있고 그나마도 7층 가운데 3층만 남았다.

남북조시대에 창건된 이래 왕원사, 법성사, 건명선원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송나라 때 광효사로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광효사 역시 문화혁명의 광기를 피하지 못해 한때 가무학교로 이용되기도 했다. 다행히 80년대 말부터 서서히 사찰의 면목을 되찾아 해동의 순례객을 맞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유명한 풍번문답과 관련한 유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풍번문답의 역사를 상징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는 듯한 번이 경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사진설명>풍번문답을 연상케 하는 번이 곳곳에 걸려 있다.

혜능 스님은 광효사에서 1년여를 머무르다가 조계산으로 향했다. 이때 혜능 스님의 법을 청해 듣기를 갈망하던 소주(현재의 소관시) 자사 위 사군이 찾아와 대범사에서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육조 혜능 스님이 발길을 돌려 대범사로 향했다. 이 대범사는 훗날 대감사(大鑑寺)로 개칭됐고, 이곳이 바로 육조의 법손인 동토(東土) 선종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성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단경(壇經)』을 설한 장소다.

『단경』 설법 대감사는 시장에

소관시 시장 한 복판에 자리잡은 대감사는 아주 작은 절로 사천왕문과 대웅보전, 요사채가 전각의 전부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해 이미 잠긴 문을 겨우 열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때마침 스님들이 대웅보전에서 신도를 대상으로 의식을 진행하고 있어서 겨우 예를 올리고 돌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절에 들어서는 사천왕문 위에 걸린 ‘단경성지’‘대감선사’두개의 편액, 그리고 대문 양쪽에 걸린 ‘당나라 때의 육조 스님이 이 절에서 육조단경을 설했다(대당성세개보소(大唐盛世開寶所) 감조수기연단경(鑑祖隨機演壇經))’는 내용의 주련이 육조 스님이 단경을 설했던 사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광동성 광주시=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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