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할’ 선종가풍 깃든 의발탑만 남아
‘임제할’ 선종가풍 깃든 의발탑만 남아
  • 법보신문
  • 승인 2007.05.1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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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9. 임제사(臨濟寺)

<사진설명>임제사에는 특별하게 남아있는 유물이 없다. 임제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의발탑만이 외롭게 서있다.

“황벽이 뭐라 가르쳐 주던가”

“조사가 오신 적적한 뜻을 세 번이나 물었으나, 매번 매만 맞았습니다. 제게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황벽이 그렇게 그대를 위해 노파심(老婆心)으로 애를 썼는데 아직도 허물을 찾다니”

“(임제는 이 말에 크게 깨닫고)그의 불법에 아들이 얼마 안 되는 구나”라고 했다.

대우 스님이 “아까는 모르겠다 하더니, 이제는 또 얼마 안 된다 하니 이게 무슨 짓이냐”하고 호통을 쳤고, 동시에 임제가 한 대 갈기니 대우 스님이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내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잡았던 임제의 옷깃을 놓았다.

임제가 황벽에게 돌아오니 황벽이 물었다. “어찌 그리 빨리 돌아오는가” “너무 노파심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법유당에 명시대 조성 임제상

이어 임제에게 대우 스님과 있었던 일을 들은 황벽은 “그 대우 늙은이 오기만 하면 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임제가 “기다리지 말고 지금 보시오”하며 황벽을 한 대 갈기니 황벽이 크게 웃었다.

전등록에 전해지는 임제의 깨달음 과정이다. 임제는 지금의 조현 조주 출신으로 속성이 형 씨다. 어려서 사미계를 받고 848년에 황벽 회상에 들어 3년 동안을 참선정진에만 힘쓰던 중, 황벽에게 불법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물으러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세 번 모두 머리통이 깨져라 얻어맞기만 했다. 이에 자신의 근기를 비관하여 하직 인사차 황벽을 찾았을 때, 황벽이 대우를 찾아가도록 했던 것이다. 대우를 찾아서야 비로소 황벽의 가르침을 알아 깨달음을 얻은 임제는 스승 황벽을 한 대 갈기는 것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이때부터 그 유명한 ‘임제할(臨濟喝)’의 선종 가풍을 세웠다.

이후로 덕산의 선방에서 매질이 그치지 않았던 것처럼, 임제의 선방에서는 고함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스님들의 법문 중에 ‘할’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으나, 방과 할이 본래의 생명력을 잃고 단순히 모방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이 상존하고 있다.

어쨌든 임제의 할은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면 정정현 정정시에 임제의 선풍을 느낄 수 있는 임제사가 있다.

시골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정정시 시내 2차선 도로를 지나다보면 길가에 임제로라고 적힌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로 30여 미터 들어가면 임제사가 나온다. 옛적 임제의 행화도량이었던 본래의 임제원은 이미 소실되었고, 현재의 임제사는 묘탑을 관리하던 탑원 자리였다. 그럼에도 임제탑은 잘 보존되어 해동의 객을 맞아 주었다.

당 예종 때 건립된 탑의 본래 이름은 ‘당임제혜조징영탑(唐臨濟惠照澄靈塔)’으로, 8각 9층에 30미터가 조금 넘는 전탑이다. 임제가 입적하고 다비장을 통해 얻은 사리를 한단의 임제사와 나누어 두 곳에서 탑을 세웠으나, 현재 한단 임제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이곳에만 탑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임제의 법이 흐르는 근본을 이룬다’는 뜻으로 세워진 법유당.

임제탑은 동기와 탑개 전탑이라서 그 색깔을 따라 청탑(靑塔)으로도 불리고, 또 사리와 함께 임제 스님이 생전에 사용하던 발우 및 가사 등을 안에 넣어 건립했다고 해서 의발탑(衣鉢塔)으로도 불리고 있다. 중국 사찰의 대부분이 문화혁명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임제탑은 당시 보호문물이었던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제탑과 마주보는 곳 20미터 정도 거리에 대웅보전이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 오른편으로 법유당(法乳堂)이 있다. 중국의 선종 사찰은 보통 개산조를 모셔놓은 곳을 조사전으로 하는데, 이곳 임제사는 조사를 모셔놓은 전각을 법의 젓 줄기 또는 법이 흐르는 근본을 이루는 대지라는 의미의 법유당으로 이름 붙여 놓고 있다. 법유당 안에는 명나라 때 나무로 조성한 임제상이 봉안돼 있고, 중국 선불교의 초조 달마대사와 육조 혜능대사의 상이 함께 봉안돼 있다. 법유당 벽면에서 임제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기록물을 볼 수 있다.

임제사에서는 임제 스님의 선풍을 흠모하는 일본 임제종의 손길이 닿은 곳도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법맥과 선풍이 임제선에 있듯, 일본 또한 임제선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인연을 기념해 일본 임제종이 세웠다는 전등당이 대웅보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웅장함 대신한 소박함이 매력

<사진설명>임제사 스님이 다실 문을 열고 있다.

대웅전의 뒤편으로 장경루와 원통전이 잇닿아 있고, 법유당 오른쪽으로 길게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마침 임제사에서 수행중인 스님이 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잠긴 문을 열더니 차 한 잔 하자며 웃는다. 임제 스님이 자신을 찾아오는 객들에게 “차나 한 잔 하라”고 했듯, 이곳의 스님들은 객을 맞아 차를 대접하는 것이 일상 관례인 듯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빠듯한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는 처지라 한가롭게 차를 마실만한 여유는 없었다.

임제의 선사상은 자유에 입각한 인간 자체가 중심이다. 스승 황벽을 한 대 갈기고 소리를 질러 깨달음을 인가 받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소 과격한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형식적인 전통이나 권위주의 사상을 벗어나 과감하게 인간존중을 강조했다.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인간 본연의 청정한 자성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 임제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임제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진정한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결코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마음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마주치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끊어 죽여버려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일체의 사물에 걸림이 없어야 해탈자재한 경계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과 주관을 갖고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임제할의 선풍을 드날리던 시절 평소의 가르침이 그렇기에 임제는 후학들에게 ‘수처작주 입처개진(隋處作住 立處皆眞·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을 당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임제사는 그저 소박하고 소탈하다는 느낌만이 있을 뿐, 크고 웅장한 모습이 전혀 없다.
 
하북성 정정현=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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