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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설잠 김시습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다시는 노예 되지 않고 오직 주인공으로 살아가리라”

흔히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목숨이나 상황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운명이라 한다. 원인 없이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 하나 있을까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굳이 운명을 얘기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때때로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스님의 삶이 그러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두 살 때 시를 배웠으며,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신동. 그의 이름은 서울에 널리 알려졌고, 다섯 살 나던 해에 세종이 직접 승정원을 시켜 김시습을 시험한 뒤 그 능력을 칭찬하고 비단까지 하사했던 불세출의 천재였다. 특히 세종은 “그 아이의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히 정성스레 가르쳐 키우도록 하라. 성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뒤에 크게 쓰고자 하노라” 하는 전지(傳旨)까지 내렸다. 이러한 임금의 지극한 관심은 오히려 성안의 온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오세신동이라 부르는 계기가 됐고, 장차 그가 조선을 이끌어갈 명재상이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운명’이 불쑥 찾아왔다. 김시습의 나이 열아홉 살 되던 해인 1453년, 과거공부에 매진하던 그에게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몇 날 동안 통곡한 뒤 책을 불사르고 승복 차림으로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문(佛門)에 든 스님은 세속을 등지고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자연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변절자에 대한 독설과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들었던 그는 생육신이라는 충신의 사표로 일컬어지고, 특히 율곡 이이는 ‘김시습은 동방의 공자이니 공자를 보지 못한 즉 김시습을 보면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후대 사람들도 율곡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의 삶을 ‘심유적불(心儒跡佛)’, 즉 비록 그는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절의의 선비적 삶을 지향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남긴 2200여 수의 시와 『금오신화』 등 많은 저술에는 유학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법화경별찬』, 『화엄석제』, 『대화엄법계도주』, 『십현담요해』, 『조동오위요해』 등 수준 높은 교리해설을 시도했다는 점은 그의 삶을 ‘심유적불’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도록 한다.

매월당, 청한자로도 유명한 설잠 스님은 21세에 출가해 47세 때 잠시 환속했으나 세상을 떠나는 59세 때까지 다시 승려의 신분으로 지내다 1493년 3월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스님은 승려, 천재, 나그네, 선비, 도가 수련자, 농부 등 다양한 얼굴로 나타납니다. 요즘 유행하는 ‘같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늘 규정하고 그것으로 바라보고 싶어 하네. 승려면 승려, 유학자면 유학자, 아내면 아내, 남편이면 남편, 그런데 왜 그 틀을 고집해야 하지. 규정은 왜곡일세. 그게 사람을, 세상을 비뚤게 보게 되는 원인인 게지. 나는 그저 내게 직면한 현실을 살아갔던 김시습일 뿐이네.”

▷스님에게는 ‘오세신동’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닐 정도로 어릴 때부터 대단한 천재였던 것 같습니다. 만 한 살도 되기 전에 한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천재이기에 오는 부담감과 자부심도 자못 컸을 것 같은데요?
“천재란 특정 능력에 대해 범재와 둔재를 염두에 둔 단순한 비교이네. 개개인 모두가 천재일 수 있고 또 스스로 박제를 만들어 가는 거지. 나 또한 그렇고….”

▷스님께서는 다섯 살 때 세종임금과의 인연이 스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혹 그것 때문에 ‘충(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더욱 반항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닌가요? 한 임금만을 섬겨야 한다는 충도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 아닙니까?
“충 또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일세. 허나 백성이 있고 국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 이데올로기 또한 무작정 배제할 수 있겠나. 신(信)과 의(義)는 나라의 근간이네. 이게 무너지면 인심도 무너지고 백성은 권력을 쥔 머리 검은 짐승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네.”

▷스님의 많은 시에는 냉철한 이성과  자기절제 안에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가 깊이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과 분노를 소멸시키려 하기보다 갈수록 키워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난 평생 안주를 거부했네. 그건 석가와 공자와 노자를 스승으로 삼았지만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네. 퇴계 이황의 말처럼 일종의 이인(異人)으로 괴상한 일을 일삼았던 무리로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됐다는 평가가 가장 잘 어울리는지도.”

▷스님께서는 승복을 입고 약 40여 년을 불문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불자의 무리가 인연과 업보를 논하는 것은 교언(巧言)이요, 세속의 일을 멀리하는 것은 영색(令色)’이라거나 ‘불교란 이적(夷狄)과 한 가지 법’이니 ‘이치를 궁구하고 천성을 극진히 하여 이를 물리친다면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얽매이지 않는 방외(方外)의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스님이 몸담고 있는 불가에 그런 평가를 하신 것은 다른 불교인들의 삶마저 부정한 것 아닌가요?
“나는 부처는 인정하지만 교단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네.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려는 것은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토끼 뿔을 찾으려는 승려들이 많았고 부처를 팔아 생계를 연명하려는 자들 또한 많았네. 이러고도 어찌 도(道)라 하겠나. 일이 도(道)이고 땀이 의(義)이고 자비니라.”

▷선(禪)수행만으로는 인(仁)을 실천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선을 지나치게 성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자애를 으뜸으로 삼으셨고 그것은 인과 다르지 않네. 나도 참선을 오랫동안 했지만 탐심을 제거하는 내면 수양의 도라는 데는 이견이 없네. 그럼에도 참선만 하고 있다고 해서 중생이 저절로 구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일세. 선이 중생의 고통에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신의 안락만을 위한 행위일 따름이네.”

▷스님을 일컬어 불교의 외피로 가장한 불우한 유학자 혹은 유학을 방편 삼아 불교에 빠져 든 선승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 당시 사상의 양대 축이라는 유교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획일화는 거부했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사적으로 관습적으로 형성된 틀, 그러니까 유교와 불교의 본질이 아니라 권력행사의 방편으로 전락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거였네.”

▷‘다시는 세상 노예 되는 일이 없이 오직 주인공으로 살아가리라(更無形物役 唯有主人公)’는 것도 획일화에 저항하겠다는 강력한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누구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그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않으면 결국 물질과 정신의 노예가 될 뿐이라네.”

▷기록에는 스님께서 ‘나무를 깎아 농부가 밭 갈고 김매는 형상을 만들었는데 그 수가 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것을 책상 옆에 벌려 놓고 온종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통곡하며 불살랐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또 고위층 임명 소식을 듣고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사람에게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가’하고 통곡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백성은 고된 노역에 죽어나가고 여기저기선 굶주려 초근목피를 찾아 헤매는데 나는 이들을 위해 그 무엇 하나 할 수 없다는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네. 그저 눈물이 흐를 뿐.”

▷어쩌면 그 나그네의 삶이 스님을 절세의 시인이자 사상가로서의 발자취를 남기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랜 세월 한 곳에 상주하지 않고 길 위에서 보냈는데 그 길에서 찾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대저 천지는 만물의 여인숙이요, 세월은 천지간에 쉬지 않고 가는 영원한 나그네라. 눈물을 동이로 흘린 것도, 한 숨을 섬으로 토한 것도 길 위에서였네. 허나 어이 알았으랴 세상살이 한 평생 시름인 줄을, 늘그막에 하나 안 것이 공이었다네(平生豈解愁塵事 到老惟知樂大空).”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심경호 『김시습평전』,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윤채근 「김시습의 삶-초월의 줄타기, 또는 장기 지속된 자살」, 진경환 「김시습과 심유적불의 문제」, 이법산 「매월당의 불교세계」 등


설잠 스님 어록
‘한줌 향은 다 타가고 가을밤은 깊었는데/ 귀뚜라미 소리며 달빛이 선심(禪心) 흔드네./ 백년 한 세상 사람의 일 헤아릴 수 없고/ 삼세의 망령된 인연 찾을 곳이 없어라./ 뜰 나무는 정히 바람 이슬 딱딱한 게 근심되고/ 산새는 골 안에 구름 든다 재재거리는 듯./ 창포 방석 종이 장막 물보다 더 맑은데/ 한가히 불경 펴서 들고 고금을 열람하네’
 (『매월당전집』 권2중)

“만약 싯다르타 태자가 그 보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지극한 도를 사모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지 않았더라면 누가 능히 소경과 귀머거리 같은 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도록 할 수 있겠는가? 싯다르타 태자는 성왕(聖王)의 아들인데도 욕심을 버리고 애정을 과감히 떨치고 기꺼이 지극한 도를 구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 고해의 윤회를 달갑게만 여기는가.” (『매월당전집』 권16중)

“부처의 뜻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크게 깨닫고 능히 인(仁)하며 세상을 응(應)하게 하고 중생을 교화함이다. 남종의 혜능이 ‘불법은 세간에 있어 세간의 깨달음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니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매월당전집』 권16 중)


후대의 평가

“설잠 비구는 불자에게는 불교를, 유생에게는 유학을 말한다는 태도를 취하였고, 결코 상대방에게 다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시인을 만나면 시, 검객을 만나면 검이라는 태도였다.”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지견 교수)

“김시습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의미는 절대화를 지향하면서 권력을 지향하려는 모든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태도, 그리고 그 획일화에 저항함으로써 그로 인해 억압된 모든 잠재력과 가능성을 생동하게 살려내려는 지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동대 진경환 교수)

“조숙한 천재, 외로운 방랑자, 꿈꾸다 죽은 늙은이. 생전에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미워하지 않았다. 뒷날 그를 절의의 화신으로 받든다든가, 천재 시인으로 추앙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의 진면목을 온전하게 파악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세간의 명리를 벗어나 지팡이 하나, 짚신 한 쌍으로 무심한 구름과 사심 없는 달빛처럼 지적하던 사람이 그, 김시습이다.” (고려대 심경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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