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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추구하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15. 반야(般若)

<사진설명>고우 스님이 중국 황매현 오조사를 방문, 혜능 스님이 수행했던 방앗간을 돌아보고 5조 홍인 스님의 진신상이 봉안된 조전을 참배하고 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겨 버립니다. ‘나다’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부터 반야도 끊기고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자기 마음부터 괴롭고 자기가 자기를 학대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무아(無我)임을 알아야 하고 어째서 무아인가 하는 것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아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뱐야가 생긴다.
이것은 ‘나’라는 것이 연기(緣起)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空)이고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는 그것을 알면 반야가 나오게 됩니다.

마음 가운데 항상 어리석되 스스로 ‘나는 반야를 닦는다’고 말하나,
‘나다-너다’ 생각하는 게 어리석은 겁니다. 마음 가운데 항상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나는 닦는다고 말합니다.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수행을 잘하는 것처럼 얘기해요. 그것은 절대로 수행이 아닙니다.

뒤에도 나옵니다만, 밖으로 조건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밖으로 조건을 추구하는 것 가운데 물건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또 수행도 밖으로 추구하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 항상 어리석되 스스로 나는 도를 닦고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소한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병을 병으로서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육조 스님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반야는 형상이 없다. 지혜의 성품이 바로 이것이다.
지혜가 나오는 그 자리 성품이 곧 반야성품입니다. 예를 들어 거울이 있으면, 그 거울에 모든 물건이 비치지요. 비치는 성격이 없으면 물건이 안 비치거든요. 그 비치는 성격이 사실은 반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는 절대 만들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나한테 그런 요소가 있는 것에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수행해서 만들어서 그렇게 된다 그러면 어렵지요.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 그렇게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무엇을 바라밀(波羅蜜)이라 하는가? 이것은 인도 범어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다.
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반야 지혜로 저 언덕에 건너가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합니다.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곳입니다. 인도에 다양한 언어가 있는데 경을 결집한 언어가 두 가지입니다. 흔히 우리가 범어라 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북방 쪽에서 경전을 결집했던 언어이고, 남방 쪽으로 결집된 언어는 빨리어라 합니다. 이 산스크리트어가 언어 중에 고급 언어입니다.

당시 인도에서 부처님께서는 산스크리트어는 사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라문들이 부처님께 ‘부처님은 고귀한 분이니까 고급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쓰시면 좋겠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단호히 거절하는 대목을 경전에서 봤습니다. 부처님이 서민적이고 언어도 그렇게 쓰셨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언덕’과 ‘이 언덕’이 갈라지는데, 실제 우리가 깨닫고 나서 자기의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승불교를 얘기할 때 생활을 통해 수행해서 불교를 완성하고, 그 완성된 불교를 가지고 생활을 완성하고 이렇게 해서 생활과 불교가 둘이 아닌 그런 입장에서 생활해 가는 것을 도인들은 평상심(平常心)이라 했습니다.

평상심이 작용이라면, 작용하지 않을 때는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저 언덕이라고 했지만 저 언덕과 이 언덕은 없습니다. 굳이 얘기한다면 외적으로 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속에 이 언덕과 저 언덕이 있는 것이고, 내 마음속에 이 언덕 저 언덕 하는 것도 깨닫고 나면 마음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에서 저 언덕 하는 것은 ‘너다-나다’를 초월한 그 자리를 얘기하는 것이고,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나다-너다’ ‘있다-없다’는 이원적인 사고를 하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뜻은 생멸(生滅)을 떠난다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생멸을 여윕니다. 이 생멸(生滅)이 ‘좋다-나쁘다’ ‘있다-없다’ ‘너다-나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으니,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으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고,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경계에 집착하면 ‘나다’에 집착하고, ‘너’에 집착하고 ‘있다’에 집착하고 ‘없다’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나다-너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무엇과 같으냐 하면 물에 파도가 이는 것과 같습니다. ‘있다-없다’에 집착하면 곧 이 언덕입니다.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어지고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며 그래서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생멸(生滅)이 일어나는 건 뭡니까? ‘나다-너다’ 하면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생멸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것은 물에 파도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생멸이 없는 것은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생멸은 물이 파도치는 것과 같다 그랬으니까 생멸을 여의는 것은 잔잔하게 그냥 있는 물과 대비가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깨닫든 못 깨닫든 우리 마음의 속성은 항상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앞에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無住)로서 본(本)을 삼고 무상(無相)으로서 체(體)를 삼는다”고 했어요. 우리 존재 원리의 속성은 어딘가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멸이 일어나면 파도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파도는 나쁜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생멸이 일어난 것을 파도가 일어나는 것에 비교하여 중생으로 표현했는데, 우리가 예를 들어서 흙탕물을 갖다 놓고 그걸 가라앉힌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맑은 물만 다른 용기에 옮겨 가지고 그걸 흔든다고 해서 흙탕물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맑은 물이 흔들리고 있지요. 그 본질 자리를 깨닫게 되면 작용하더라도 흙탕물이 안 일어나고 맑은 물이 움직이듯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자재하면서 일상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하고 도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망상 분별심이 거기 섞여서 일어나고 있는 파도를 얘기하는 것이지 그것이 정화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조건 파도는 나쁘다 이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 물이 세탁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 이게 문제이지 파도는 나쁜 게 아닙니다. 파도는 평상심입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그 자리를 알면 그때부터는 내 마음 그걸 본 그 자리가 세탁기 역할을 해서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는 것이 일어날 때 다 세탁해버려요. 그러면 맑은 물로 작용이 일어나고 있지요. 그것은 절대 나를 괴롭힌다든지 남을 괴롭히는 일은 안 합니다. 그걸 조사 스님들이 평상심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다-너다’ ‘있다-없다’는 불순물이 들어가서 파도를 치고 있으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이죠. 그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 일어나는 거 이게 다 나쁜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목석처럼 가만히 있어야 공부다 하는 잘못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형상은 보고 있는데 본질은 못 본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그 본질을 보게 되면 그때는 세탁기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자비와 지혜가 있어서 그 사람은 정말로 이해심 많고 적극적으로 남을 돕고 자기를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파도가 나쁜 건 아니다. 불순물이 낀 파도를 여기에서는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그 앞에 물이 끝없이 항상 흘러가는 그것은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에서 흘러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적적성성(寂寂惺惺)을 하고 있어야 불교입니다. 적적성성이 안 되면 그것은 외도(外道)입니다. 왜 적적성성(寂寂惺惺)이 불교냐? 우리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제 말을 듣고 있으니까 성성(惺惺)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말을 듣고 있으니까 성성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항상 손바닥을 성성(惺惺)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면에는 뭐가 있습니까? 손등(적적)이 있잖아요. 이것을 쌍조(雙照)라고 합니다. 그러면 적적(寂寂)을 하고 있으면 그 이면에는 또 뭐가 있습니까? 또 성성(惺惺)이 있잖아요. 이것을 쌍차(雙遮)라 합니다. 이게 항상 같이 가고 있는 거예요. 이 원리에 어긋나게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원시불교나 대승불교가 똑같이 갑니다.

불교 수행은 포장만 다를 뿐이지 내용물은 같아야 합니다. 내용물이 다르면 불교가 아니니까 내용물이 같아야 됩니다. 내용물이 같다고 한다면 서로 서로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공부하는 분들 중에 자기 공부만 제일 좋은 공부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공부는 시원찮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독선에 빠지면 그것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독선에 빠지는 사람은 절대로 적적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입으로 적적성성한 불교를 얘기하면서 마음 상태는 외도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리석으면서도 나는 수행하고 있다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우를 범하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승속(僧俗) 간에 다 있거든요. 그런 점은 경계해야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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