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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노국대장공주

기자명 법보신문

몽골여자로 태어났으나 고려의 혼이 되리라

고려 왕위 계승 둘러싼 정략 결혼의 희생자
공민왕과 애틋한 사랑…반원정책 함께 추진
아이낳다 안타까운 죽음…고려 쇠락의 원인

후일 공민왕이 되는 스무 살의 고려 왕자 왕기가 10대 후반의 원나라 공주 보탑실리와 결혼한 것은 고려국왕에 오르겠다는 야심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정략결혼으로 만난 두 사람은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사에서도 대표적인 러브스토리로 손꼽힌다.

10대 초반에 원의 볼모로 끌려가 연경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은 두 차례나 왕위계승에 실패했다. 그의 형 충혜왕이 죽었을 때 공민왕은 자신이 왕위를 이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이미 3년 전부터 원나라에 숙위하면서 황제로부터 대원자(大元子) 즉 왕위계승권자의 칭호를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왕위를 이었다. 역련진반공주의 아들인 충목왕은 원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4년 뒤 충목왕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죽자 다시 한 번 왕위계승의 기회가 찾아왔다.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의 왕위계승을 결정했다가 사신이 고려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충혜왕의 서자 충정왕을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 두 차례 왕위계승에 실패한 공민왕은 결국 몽골공주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그가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원 왕실에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할 방법이 결혼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려로 시집온 몽골 공주들은 다들 하나같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남편의 자격지심, 언어소통의 불편함, 이국생활의 외로움 등은 고려의 왕도 몽골출신의 왕비도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충분조건이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정치적 목적으로 만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커플만은 달랐다. 무슨 영문인지 이들은 결혼할 때부터 사랑에 푹 빠졌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그럴싸한 것이 두 사람의 예술적 코드가 맞았다는 이야기다.

공민왕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영호루 등에 현판 글씨를 남길 정도로 명필이었으며 한국 역대 왕 중에서도 예술적인 소양이 단연 뛰어났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노국대장공주 또한 공민왕 못지않은 예술적 소양을 지닌 여자였던 것 같다. 그녀가 고려로 올 때 배에 싣고 온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간책과 서화들이었다.

이후에 나타나는 그녀의 행적 또한 왜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공민왕은 정치적으로는 아주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노국대장공주와 결혼 2년 만에 충정왕이 폐위되고 공민왕은 마침내 고려국왕에 책봉되었다. 비록 원의 부마가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고려로 돌아온 직후부터 공민왕은 강력한 자주정책을 전개했다. 원의 거점 역할을 하던 정동행성을 몰아내고 기황후의 일족인 기철 일당을 제거하는 한편 과거 고려의 옛 제도와 영토를 복원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리 충성한 자라 할지라도 조금만 세력이 커지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숙청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노국대장공주가 남편의 반원정책을 단 한 번도 반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고려에 시집온 태생적 목적이 바로 고려왕실에 대한 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려를 자주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남편의 큰 뜻을 적극 지지했다.

노국대장공주는 여리디 여리게 마련인 보통의 황족 여인과는 다른 성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되레 몽골고원의 억센 기질을 타고난 아주 대범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대범함은 남편을 수차례 위기상황에서 구해냈고, 자신을 남편의 정신적 의지처로 자리매김 시켰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안동으로 피난을 갈 당시 그녀는 가마를 버리고 말을 직접 몰았다. 오히려 말을 타지 못하는 남편을 이끌고 엄동설한의 위기상황을 헤쳐 나갔다. 이때 왕의 수행인원은 겨우 28명이었다.

홍건적이 물러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이 모두 불탔고 시가지는 모두 폐허가 되어있었다. 공민왕은 궁궐을 수리할 때까지 흥왕사를 임시처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용의 부하 50여명이 공민왕을 시해하기 위해 흥왕사로 쳐들어왔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 챈 왕비는 급히 공민왕을 명덕태후의 침실로 대피시키고 왕의 옷을 걸친 내시 한 명을 남겨놓았다. 그 자리에서 왕을 위장한 내시는 반란군의 칼을 맞아 죽었다. 왕비는 곧바로 태후의 처소로 달려가 공민왕을 숨기고 밀실로 통하는 작은 문 앞에서 칼을 들고 버티고 있었다. 반란군은 ‘원 황제의 명’을 내세우며 공민왕을 처단하려고 했기 때문에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온몸을 내던진 공주의 지략과 용기로 공민왕은 시해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대범한 성정과 예술적 취향을 동시에 갖춘 그녀에 대한 공민왕의 사랑은 지극하고 또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사랑하는 아내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자주 절을 찾았으며, 공주가 가장 존경하던 스님 태고보우를 국사로 삼았으며, 종종 그를 궁궐로 초대해 설법을 듣곤 했다. 이때 공주가 고마워하며 흘린 눈물이 옷고름을 적실 정도였다.

하지만 한 쌍의 원앙 같던 이들에게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공주에게는 도무지 아이가 들어서질 않았다.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후사를 얻게 해달라고 불보살 전에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신하들은 수차례 왕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주청했고 결국 노국대장공주 또한 공민왕에게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신하들의 닦달에 못 이겨 후비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이내 공주가 침울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공민왕은 후비의 처소에 들지 않고 계속 공주만을 찾았다. 『고려사』에는 “공주가 (후궁 들인 것을) 다시 후회하여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결혼 15년 만에 드디어 공주가 회임을 했다. 이때 공민왕과 공주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민왕은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 그러나 1365년 2월 공주는 아이를 낳다가 그만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은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공민왕은 공주의 어진을 그려놓고 그 그림 앞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울고 또 울었다. 술이 취하면 주변의 환관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 공민왕은 또 공주를 기리는 영전(靈殿)을 승려 3000명이 동시에 들어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로 짓느라 국고를 탕진했고 국정은 아예 돌보지도 않았다. 그 사이 왜구는 끊임없이 남해안을 공격했고 고려의 내부질서는 빠르게 붕괴되어갔다. 게다가 공민왕은 미소년들을 불러 모아 동성애를 벌이는 등 변태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후궁들과 동침을 할 것을 요구했다고도 전한다.

『고려사』의 기술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패닉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공민왕은 공주가 죽은 후 후사 얻기에 몰두했다. 자신의 아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에 공주의 무덤을 지켜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자신이 죽으면 공주의 영전과 무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을 걱정해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고 했던가. 그토록 냉혹하고 섬뜩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던 공민왕은 자신이 온갖 열정을 바쳐 바로세운 고려를 그렇게 소멸의 길로 몰아갔다. 공민왕은 공주가 죽은지 9년 뒤인 1374년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당했고, 그로부터 18년 뒤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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