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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종장 원 광 식

기자명 법보신문

40여년 외길 걸어온 법계 깨우는
범종 소리 빚다

조선 중기 끊겼던 전통종 제작 기법
10년 각고 끝 찾아 신라종 완벽 복원

<사진설명>한쪽 눈을 잃었지만 작은 깨달음을 얻은 원광식 종장은 오늘도 범종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 쪽 눈을 잃었으니 수평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종은 만들 수 없다.”

스승이자 8촌 형님이기도 한 원국진 장인의 한마디는 청년 원광식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종에서 손을 뗀 그는 1년 가까이 방황했다. 지난 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963년 그는 스승 원국진 장인의 권유에 따라 종 만드는 일에 손을 댔다. 신의주에서 주조 작업을 했던 원국진 장인은 3.8선이 그어지던 무렵 남쪽으로 내려왔고 ‘성종사’ 이름으로 종 만드는 일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승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자신의 일을 대물림 할 수 없었던 스승은 급기야 8촌 동생 원광식에게 자신의 가업을 이어주기를 당부했다.

스승이 ‘형님’이니 자상한 가르침을 기대했을 터.

“망치 하나 좀 늦게 가져가면 그 자리서 호통입니다. 나는 빨리 갖다 준다고 하는데도 굼뜬다고 야단이지요. 일 시작 전에 연장 하나라도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발, 주먹 사정없이 날아왔어요.”

한쪽 눈 실명 후 방황

<사진설명>원광식 종장이 복원한 성덕대왕 신종, 원광식 종장은 현재 실물크기의 성덕대왕 신종 복원에 매진하고 있다.

혹독한 가르침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배워갔다. 망치질 하나, 쇳물 끓이는 일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또 눈여겨 보았다. 그의 첫 노력 결실은 1969년 맺어졌다. 금산사 범종과 법화종 총무원(성북구) 종각 범종을 스승과 함께 자신의 손으로 빚은 것. 당시만 해도 조선 말기로 접어들며 전통 주조 작업의 맥이 끊겼었기 때문에 종 만드는 기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성종사에서 범종을 제작했다는 소식에 청담 스님도 직접 작업장을 방문해 종을 울려 보고는 “우리도 이젠 범종을 만들 수 있구나!”하며 감격에 젖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열정은 더욱 타올랐다. ‘나도 종을 만들 수 있구나’하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 그러나 그의 열정은 불행으로 다가왔다. 작업 중 쇳물이 한쪽 눈에 들어가 실명에 이른 것. 일 배운 지 5년여 만에 당한 사고였다. 그러자, 스승은 “이제, 종은 만들 수 없다”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결단을 내렸다. 한쪽 눈 잃은 것도 서러웠을 그가 지난 5년 동안 배운 일마저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안 순간 느꼈을 낙담은 참담한 그 자체였을 것이다. 1년의 방황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1970년, 그는 다시 작업장에 나타났다.

“한 쪽 눈은 잃었지만 한 쪽 눈은 정상 아닙니까? 대다수 사람들이 수평 볼 때 한 쪽 눈 감고 보잖아요?”

종은 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즈음 수덕사에서 국내 최대 범종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수덕사로 달려가 그 자리서 머리 깎고 마당에 천막을 쳤다.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홀로 자신의 손으로 종을 만들어 보겠다는 원력이었다. 3년의 각고 끝에 천관짜리 수덕사 범종을 완성했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군요.”

<사진설명>한마리 용이 조각된 용뉴가 인상적이다.

이 때 스승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승의 뜻을 가슴에 새겼던 그는 ‘성종사’를 인수해 가업을 이어갔다. 이 때 그는 또 하나의 원력을 세웠다. 전통 기법에 따른 범종을 제작해 보겠다는 것.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범종학회도 설립해 전통 기법과 우리나라 종의 우수성을 연구해 갔다.

성덕대왕 신종 하나만 보아도 신라의 종 제작 기술은 세계 최고임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 종소리는 중국과 일본과 비교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맑으면서도 은은하지 않습니까? 종에 새긴 비천상이며 구름 등의 문양을 보세요. 미학 측면에서도 단연 으뜸입니다.”

신라의 이러한 주조 기술은 밀랍주조공법에 기반한다. 문제는 밀랍주조공법에 따른 거푸집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이 관건이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거푸집을 만들어 보았지만 녹아내리기가 다반사였다.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나라들이 이 기법을 발휘하지 못하는데는 더운 기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에 혹, 이 기법이 살아 있을까 해서 그 곳 장인들을 만나려 했지만 문화혁명이라는 태풍 앞에 장인들은 사라진 상태였다. 일본에도 가 보았다.

“기술은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신라종에 대한 연구를 깊게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공개를 안 해요. 할 수 없이 그들에 뺏어간 신라 종만 구경하고 왔지요.”

범종학회와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의 연구로 우리 종의 독특한 미적 아름다움과 소리의 원리는 찾아가고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기법은 찾을 길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다시 경주로 발길을 돌렸다. 신라의 우수한 종이 경주에서 탄생했으니 그 곳에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밀랍주조공법의 열쇠는 ‘활석’이었다.

활석 찾아 밀랍공법 완성

“활석은 부드러우면서도 열에 아주 강한 내화력이 있습니다. 특히 활석 가루와 전분을 섞어 밀랍을 감싸면 1000도의 쇳물에도 끄덕 없거든요.”

활석으로 인해 녹아내리는 거부집 붕괴를 방지함은 물론 쇳물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기포도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범종 복원에 매진했다. 우선 일본으로 다시 달려가 신라 범종을 실리콘으로 떠 왔다. 얼마 후 일본이 소장하고 있던 신라의 ‘운수사 범종’은 그의 공법에 의해 완벽하게 복원됐다. 일본이 그토록 신라종을 연구하며 복원하려 했지만 결국 신라종은 신라의 후손에 의해 복원됐다. 신라종 복원 원력을 세운 지 1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문호재청은 그를 2001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종제작·현 종장)으로 인정했다.

범어사, 수덕사, 백양사, 금산사, 쌍계사, 고운사, 용주사 등 전구 유수 산사의 범종 대다수는 그가 빚은 작품이다. 최근 낙산사 화재로 불탄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을 복원한 인물 역시 원광식 종장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복원 역시 그가 일구어 낸 업적이다. 연말이면 서울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보신각 종도 그의 작품이며, 국내 최대 범종이라 일컬어지는 8150관짜리 ‘광주 민주의 종’도 그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싱가포르는 물론 불교국가인 태국과 스리랑카, 미얀마에서도 그가 만든 범종이 울려 퍼지고 있다.

최근 그는 충북 진천군 덕산면 합목리에 자리한 ‘성종사’에서 무문불출하다시피 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작은 성덕대왕신종 복원에 성공한 그는 원형과 똑 같은 크기의 범종 복원에 도전하고 있다.

“아무래도 성덕대왕 신종 3개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 성덕대왕 신종 일부는 마모돼 있는 상태다. 따라서 현 상태와 똑같이 복원할 것인가. 마모된 부분을 학계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살릴 것인가, 아니면 이 두 중간 단계, 즉 마모 부분을 확실히 검증해 나온 부분만을 새겨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부분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장인의 열정이 담겨 있는 한마디다.

실물크기 ‘에밀레’복원 박차

<사진설명>충북 진천 ‘종박물관’에는 원광식 종장이 기증한 160여구의 종이 전시돼 있다.

종에 관한한 단연 최고인 그는 경제적으로도 풍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범종 복원 작품에 들어가는 원가비용만도 만만치 않은데 그 범종마저 종박물관에 기증했다. 2005년 9월 개관한 충북진천 ‘종 박물관’에는 그가 제작한 종 160여구가 전시돼 있다. 그래도 각 시도에서 ‘시민의 종’제작을 요청하고 있어 생활을 꾸려가는 데 별 무리가 없다고 한다.

“내 누울 자리 있고 자식 공부시킬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 떠날 때 돈 갖고 가는 것 아니잖아요!” 지금도 그는 돈만 생기면 곧바로 범종 복원에 쏟아 붓는다. 중국 북경에서 보고 온 ‘대종사 종’(국보)도 복원해 보겠다는 원력을 세워놓고 있다. 뿐만 아니다. 스리랑카, 태국 등의 남방불교 종도 우리 전통 기법으로 재현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삼라만상 우주 법계를 일깨우는 범종을 제작하고 있는 원광식 종장. 그 역시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마음으로 종을 빚고 있는 것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범종의 기원과 종류
한국 종은 은은하고 깊어

<사진설명>상원사 동종.

범종 기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중국의 은, 주대의 예기였던 용종이나 탁(鐸)에서 발전한 것으로 한국의 종도 용종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종은 크게 나눠 동양종과 서양종으로 구분되는데 서양종은 나팔꽃을 거꾸로 한 형상을 하고 있다. 동양종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사용하는 범종을 말한다. 동양종의 경우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 국가 등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는 국가들 대부분이 자국 특유의 측징을 갖고 있다.

한국종은 역김치독형, 중국종은 역튜울립형, 일본종은 역컵형을 띠고 있다.

신라종은 이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와 은은하고도 긴 여운을 가진 청아한 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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