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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 바다에는 크고 작은 분별이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정견 갖추면 ‘금강경’
한 권 가진 것과 같다

16. 근기(根機)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도량인 조계 남화선사 조전. 조전 내부에 육조 스님의 진신상이 봉안돼 있다.

선지식아 만약 매우 깊은 법계에 들어가서 반야삼매에 들고자 하는 자는 반야바라밀행을 닦을 지니, 다만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을 가지면 곧 성품을 보아서 반야삼매에 들어감이니라.

오온이 개공이고, ‘나다-너다’‘좋다-나쁘다’가 없는 상태를 반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가지는 것이 반야바라밀행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견을 갖추면 『금강경』 한 권을 가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활자로 된 종이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고 공임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온이 개공한 것을 알면 정견을 갖추게 되고, 정견이 『금강경』 한 권을 가진 것과 같다고 했는데 화두를 가지고 성성적적되는 것이나, 정견을 갖춰서 성성적적 되는 것이나, 『금강경』을 갖고 성성적적 되는 것이나 다 똑같습니다. 경 이야기만 나오면 강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분들이 있는데, 육조 스님도 금강경을 듣고 깨쳤고 선사들 가운데도 경 구절을 듣고 깨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연기 현상으로 보면 모두 다 평등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자꾸 차별하면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히 참선하는 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은데, 모든 수행방법은 포장만 다르게 했을 뿐이지 내용물은 같습니다.

『금강경』을 가지면 곧 견성함을 얻어서 반야삼매에 든다고 했는데, 삼매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행과정에 있는 분은 미완성의 삼매이고 깨달아서 그 결과에 가 있는 분은 완성된 삼매입니다. 적적성성이 바로 삼매입니다. 그래서 적적성성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평상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적성성 상태에서 작용하지 않을 때를 무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바닥이든 손등이든 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반개 반개씩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옛날 조사 스님들이 한 개 반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공덕은 무량해서 경중에 분명히 찬탄하니 능히 갖추어서 설하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이 최상승법이니 큰 지혜의 상근기 사람을 위해서 설함이니라. 작은 근기와 지혜의 사람은 이 법을 듣고 마음으로 신심을 내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비교하건대 큰 용이 만약 큰 비를 내려가지고 염부제에 비가 오면 풀잎이 표류하는 것과 같다.

조그마한 풀이 비가 많이 오면 뿌리까지 떠서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소근기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여자라고 해서 소근기이고 남자라고 해서 대근기이고, 또 덩치가 크다고 대근기고 작다고 소근기도 아니며, 많이 가졌다고 대근기고 적게 가졌다고 소근기도 아닙니다.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은 상근기자고, 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 소근기자입니다.

만약 큰 바다에 큰비가 내리면 더하는 것도 없고 감하는 것도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상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큰바다는 상근기이고, 상근기의 사람에게는 아무리 큰비가 온다고 해도 물이 불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혹은 풀잎같이 떠돌아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상근기자는 믿는 사람입니다. 남자나 여자도 아니고, 덩치가 크고 작고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대승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설함을 듣고 마음이 열려서 깨달아 앎이라, 고로 본성이 스스로 반야지혜를 갖춰서 스스로 지혜를 써서 관조하고 문자에 가자하지 아니함을 앎이니라.
종이로 된 『금강경』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입니다. 우리가 ‘종이다’‘먹이다’하는 것을 떠나서 공과 연기현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금강경』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듣고 있는 사람은 마음이 열려서 깨닫는다고 한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 본성이 스스로 반야 지혜가 있어서, 지혜를 써서 비춰보게 됩니다. 비춰봐서 문자를 가자하지 않는 것이고, 종이로 되고 먹으로 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교하건대 빗물이 하늘을 쫓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는 빗물이 하늘 구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왕이 강물과 바닷물을 이끌어 와서 비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용왕이 강이나 바다 가운데에 몸으로 이 물을 끌어와서 일체 중생과 초목, 유정과 무정으로 하여금 모두 다 윤택함을 입어가지고,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도리어 큰 바다에 들어가서 바다가 여러 물을 받아들이고 합하여 한 몸이 됨이니 중생본성 반야 지혜도 또한 다시 이와 같나니라.

팔만사천 번뇌를 일으키고 또 팔만사천 지혜가 있다고 했는데, 팔만사천 번뇌든 지혜든 그것은 성품자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입니다. 그렇듯이 이 빗물이 떨어져 모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팔만사천 번뇌도 결국 그 성품자리에서 나오고 또 성품자리에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근기가 작은 사람은 이 몰록 깨닫는다는 가르침의 설을 듣고 비교하건대, 대지 초목의 근성이 스스로 적어 가지고 만약 큰 비를 한번 맞음을 입으면 다 스스로 넘어져서 스스로 능히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소근기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이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적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다시 이와 같나니, 반야 지혜가 있는 것은 대지혜인으로 더불어서 또한 차별이 없음이라.

아무리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도 반야지혜를 갖고 있는 것은 상근기와 똑같이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에 따라서 대인과 소인이 벌어지는 것이지, 반야의 지혜는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인해서 법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가.

지혜는 똑같이 갖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은 깨닫고 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견에 장애가 두텁고 번뇌의 뿌리가 깊음을 말미암아 큰 구름이 해를 덮어서 바람이 붐을 얻지 아니하면 해가 능히 나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사견에 장애가 두텁고 번뇌에 뿌리가 깊다고 말하니까 굉장히 번뇌가 깊이 있고 사견이 많은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이것도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는 이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이원적 사고를 일으키는 모든 번뇌나 사견들이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알면 바로 그 자리에서 지혜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견이 두텁고 번뇌가 많은 사람은 그것을 바꾸면 지혜도 그만큼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습니다. 구름을 걷어버리면 해가 나오지 않습니까. 해는 지혜인이나 상근기·하근기에게 모두 똑같습니다. 지혜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대소가 없음이로되, 일체중생이 스스로 미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음으로 자성을 깨닫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행복해지려고 무엇인가를 자꾸 구하고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부 밖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그 밖으로 구함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고통과 불만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오히려 괴로움을 더 당하는 사람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밖의 조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바로 내면의 가치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가치를 인식한 것만큼 밖의 조건도 가치가 올라갑니다. 내면의 가치를 알면 그것으로 인해서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밖으로 닦아서 부처를 찾음으로 자성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수행하는 조건을 말하는 것입니다.‘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수행하는 분들은 전부 밖으로 닦는 분들입니다.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서 닦는 분은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닦는 분입니다. 『선요』에서는 수행을 깊은 우물 속에 눈을 갖다 붓는 것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물 속에 눈을 부으면 녹아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비운다’‘놓는다’‘쉰다’고 합니다. 수행을 해서 뭔가 만들어가고, 뭔가 얻어지고, 뭐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면 공부하다가 헛것을 보고 낭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은 절대 밖으로 닦아서는 안됩니다.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염불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적적성성(寂寂惺惺)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우물에 눈을 갖다 붓듯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놓으면 큰일 나는 것과 같이 오해를 합니다. 놓으면 공허하고 허망해서 어떻게 사느냐고도 합니다. 그런데 붙들고 가는 그 ‘내’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정말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데, ‘나’라는 그것을 못 놓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것을 놓는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그 집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에게 불리하고 섭섭한 소리를 하면 주먹까지 날아가고 그럽니다. 불교수행은 자기를 놓는 것, 비우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소근기라도 몰록 깨닫는 이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해서, 다만 스스로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정견을 일으키면, 번뇌 진로 중생이 마땅히 다 깨달아 큰 바다가 여러 흐름의 물을 받아들이고 적은 물과 큰물을 합해서 한 몸이 되는 것과 같다. 곧 견성하면 내외에 주하지 아니하며 오고 가는데 자유해서 능히 집착하는 마음을 제하여 통달 무애 하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으로 더불어서 번뇌에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정견을 갖추면 『반야바라밀경』을 항상 자기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반야바라밀경』을 외우려고 노력하지 말고, 정견을 갖추게 되면 항상 가슴속에 품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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