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일행 다섯명과 봉선사를 떠나다
24. 일행 다섯명과 봉선사를 떠나다
  • 법보신문
  • 승인 2007.07.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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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하직…속가에서 하룻밤
안거 끝난 시기 만행 위장 출발

성숙은 1923년 4월 8일 비구계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으나, 이때부터는 경전공부보다 중국 유학 준비에 바빴다. 사실 말이 유학이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한 돌파구였고,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는 망명이기도 했다.

운허와 성호를 차례로 만나 중국행을 알리고 난 성숙은 얼마 후 속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를 찾았다. 성숙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집도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들을 따돌리고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터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놀고 있던 딸 숙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성숙은 딸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번은 꼭 안아주고 싶었다. 방안에 들어선 성숙은 부모에게 속가의 예를 갖췄다. 부인 정씨가 다른 때와 다른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성숙의 막내 여동생 보구와 딸 숙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방안에는 부모님과 부인만이 남았다.

성숙이 “얼마 후에 북경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러니 이제 언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집안 일은 성호가 알아서 잘 할 것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세요”하면서 북경행을 알리자 어머니는 놀란 표정이 되어 “왜 떠나느냐”고 눈으로만 물을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찍이 성숙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하는 일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오너라”하는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아버지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거라”하고는 일어섰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성숙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집안의 대를 이을 후사를 걱정하는 부친의 뜻을 알았기에 잠시 번민이 들었으나, 이 상황에서는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그날 밤, 성숙은 무려 8년여만에 부인 정씨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동안 원망 섞인 말을 하거나 서운한 표정 한번 짓지 않았던 부인은 이날도 그저 성숙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몸 보전 잘 하세요”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8년여만에 부인과 하룻밤을 보낸 성숙은 다음날 서울에서 사회주의운동에 여념이 없는 친구들을 만났다. 노선이 조금씩 다른 친구들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숙과 함께 한 자리에서 만큼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북경으로 떠난다는 성숙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뜻한바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과는 대부분 작별 인사를 한 셈이다.

봉선사로 돌아온 성숙은 출가 이후 보아왔던 경전들을 하나씩 다시 들춰보는 한편 북경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잡을지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가늠하기 시작했다. 마침 봉선사에는 3·1운동 당시 다른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스님들도 있었고,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이들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길을 택한 것은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러 가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전국 사찰에서는 그동안 산사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들이 만행을 시작했고, 서울 등 도시에도 이곳 저곳으로 옮겨가는 스님들의 모습이 적지 않게 보였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움직이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드디어 여름 끝자락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에 성숙은 일행 다섯 명과 함께 봉선사 산문을 나섰다.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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