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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피로 얻은 餘生 이타행으로 회향”

기자명 법보신문
  • 인욕
  • 입력 2007.07.23 10:04
  • 댓글 0

한국의료불자연합회 진료단장
국립서울병원 양 동 선 치과과장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다. 650개의 근육과 206개의 뼈마디, 100여개의 관절에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만은 한 동안 잊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구토 증세. 망망대해 한가운데 풍랑을 만난 조각배에 탄 것처럼 구토의 고통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고통에 시달리다 모든 것을 토하고 나면 어느새 정신은 아득히 멀어지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악몽은 다시 반복됐다.

편도암 발병에 초발심 떠올라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교수가 되기를 고대했던 국립서울병원 치과과장 양동선(46·수암) 거사. 불현듯 찾아온 병마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대학 교수의 꿈을 한순간 앗아가 버렸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함께 대학 강단에 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편도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죽음과 같은 고통이 이런 것이리라. 밝은 미래는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이제 세연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생에 대한 집착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 안타깝고 억울한 생각만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한 가닥 희망은 암 세포가 아직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사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에 모든 것을 의지한 채 힘겨운 투병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굵은 눈물방울과 함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나지막한 염송이 그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왜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연스레 입에서 보살님을 찾고 있었다. 일념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찾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깊어 갔다. 그리고 그의 의식 속에는 20여년 전 부처님과의 첫 만남과 발심의 순간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해졌다.

양동선 거사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치과대학에 입학해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봄의 일. 당시는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무참히 짓밟히던 억압의 시기로 그 역시 그 시대의 한 청년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지금껏 믿어온 개신교의 절대적 존재 앞에 엎드려 수없이 묻고 질문해 봤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비우지 않고 어찌 번뇌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우연히 찾아간 부천 석왕사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을 향해 한 스님의 벼락같은 일갈을 듣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토록 갈구하던 진정한 자유에 대한 해답을 한 마디 가르침에서 확연히 들은 것만 같았다. 무작정 법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스님처럼 참선을 해보았다. 마음이 편했다. 법당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양 거사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야기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벼락같은 호통으로 스님들을 경책하던 분이 바로 조계종 원로의원인 고산 스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자가 된 인연으로 스님에게 ‘수암’이라는 법명도 받고, 대학 시절 내내 참 열심히 수행하며 불교공부를 했지요. 한 동안 출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푹 빠져 살았었죠.”

그의 말처럼 그는 대학생활 내내 치과의사가 되는 공부보다 마음공부에 더 많이 매달렸다. 대불련 활동에도 동참하며 방학 때에는 절에서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역시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범부였기에 학교를 졸업한 후 병원을 개원했다. 분주한 일상, 부처님과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그저 시간이 허락되면 산사를 찾아 예불을 모시고, 참회하는 것으로 스스로 불자라며 위로했다.

진정한 자유 찾아 불교에 귀의

“꼭 10년간 개업의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국립서울병원에서 치과 과장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어요. 당시 병원 경영에 대한 중압감도 있었지만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곧바로 지원하게 됐어요. 거기에는 한동안 놓고 있었던 수행과 봉사에 대한 열망도 분명 포함돼 있었습니다. 저의 발심 내용이기도 하고요.”

멀쩡한 병원을 접고 월급쟁이가 된다고 하니 이해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가족들의 뜻마저도 모두 외면한 채 기어이 병원을 닫고 국립서울병원에 들어갔다. 한동안 가족들과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줄어든 수익에 반비례해 늘어난 시간은 그에게 여유를 안겨줬다. 퇴근 후에는 걱정 없이 좌선에만 매달렸고, 주말이면 무료진료 장소를 찾아 의료봉사에 동참했다. ‘편도암’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은 꼭 1년의 시간이 지날 즈음의 일이다.

약물과 방사선 치료 그리고, 수술이 병행됐다. 그를 엄습한 병마의 고통만큼이나 치료의 고통 또한 극심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최대의 강도로 치료가 진행됐고, 치료 후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며칠 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의 인내심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은 그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잠시라도 운신할 수 있는 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무료진료 현장을 방문했다. 1년 전 병원을 그만두면서 세운 서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이자 약속”이라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염불과 참선에 주력하며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평상심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투병 중에도 봉사는 계속

<사진설명>의불련 진료단장 양동선 거사는 교계 최고의 봉사맨으로 통한다.

‘병고로써 양약을 삼고, 마군을 수행의 벗으로 삼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극히 실천한 결과였을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불과 1년여 만에 그를 위협하던 암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생을 앗아갈 것 같이 그 기세가 등등했던 암 덩어리가 사라지다니, 신이하기만 했다.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했습니다. 마음 속 욕망과 아만이 업으로 변해 암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일 터인데 그 덩어리가 눈 녹듯 사라진 것입니다.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우고 내 몸을 낮추니 아마도 망상 덩어리가 모두 소멸돼 암 마저도 살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부처님의 가피로 새로 받은 몸, 작은 재주나마 이웃에게 회향하는 것이 그 가피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양 거사는 한국의료불자연합회 진료단장으로 교계 최고의 봉사맨으로 통한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때로는 약사여래의 약손이 되고 때로는 호법신장의 발이 되어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타행을 행한다.

“자신의 해탈을 위한 수행인 상구보리와 남의 해탈을 돕는 수행인 하화중생은 대승불교의 핵심이자, 나침반입니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만큼이나 자비의 실천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더 많은 대중이 자리이타의 실천에 동참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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