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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하는 마음을 알아서 본성을 보라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조계 남화선사 조전에 봉안돼 있는 육조 혜능 스님의 진신상. 중국불자들은 물론 한국불자들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17. 견성(見性)
 
일체의 경서 및 문자와 대소 이승과 십이부경이 다 사람으로 인해서 있음이니, 지혜의 성품을 인하는 연고로 능히 건립함이니라.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나는 한 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달을 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禪)입니다. 선은 철저히 달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만이 오직 진리이고 법입니다. 그리고 혹시 손가락 이야기를 하면서 수행해서 달을 보라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 두지 않고 곧 손가락을 부정하고 달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선이 최상승이고 다른 수행과 다르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른 불교 수행법은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라고 하는데, 달을 보지 못한 사람은 반대쪽으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쪽으로 가르치는 것은 달을 보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달을 정확하게 가르치면서 보라는 것이고, 그것이 지혜의 성품을 인하는 연고로 능히 십이부경전 팔만대장경을 건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을 보는 수단이지 달은 아닙니다. 수단의 말을 통해서 얼른 달을 봐야 합니다. 손가락으로 가르치니까 달은 안보고 손가락에만 매달려서 그게 진리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선종에서는 그러한 병을 겪지 않고 정확하게 바로 봅니다.

만약 내가 없으면 지혜인과 일체만법이 본래 없어서 있지 아니하다.

‘나’라는 게 없으면 ‘상근기·하근기’, ‘지혜인-어리석은 사람’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 똑 같습니다. 모두 다 평등합니다.‘지혜인이다-어리석은 사람이다’, ‘법이 있다-법이 없다’이런 말도 다 손가락 이야기입니다.

고로 만법이 본래 사람을 인해서 일어남이요 일체 경서도 사람을 인해서 설함이 있음을 알지니, 사람 가운데는 지혜로운자도 있고 어리석은 자도 있음을 말미암아서, 어리석으면 소인이 되고 지혜로우면 대인이 됨이니라.

어리석다는 말은 내가 ‘있다-없다’로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말하고, 또한 그런 사람을 소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대인이라고 합니다. 이 설명 속에서도 내가 없으면 지혜인도 없고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한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아 마음을 여나니, 미한 사람이 만약 깨달아 마음을 열면 큰 지혜의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고로 알라, 깨닫지 못하면 곧 부처가 이 중생이고 일념에서 만약 깨달으면 곧 중생이 이 부처이니라. 고로 일체만법이 다 자신의 심중에 있음을 아나니 어찌 자심을 쫓아서 몰록 진여본성을 깨닫지 못하는가.

일체 만법이 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데, 왜 마음을 쫓아서 몰록 진여본성을 보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앞에서 말하는 마음은 ‘작용’하는 것이고 ,뒤에 진여본성은 그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알면 작용하는 것을 보면서 뒷면에 작용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작용하지 않을 때는 또 뒷면의 작용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 다 깨닫는데 그것을 왜 모르는가 하는 말입니다.

보살계경에 말하되, 나의 본원자성이 청정함이라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불도를 이룸이니라. 곧 활연히 깨달아서 도리어 본심에 돌이킴을 얻음이로다.

본원자성 청정은 ‘나다-너다’,‘있다-없다’는 이원적 사고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본성을 보더라도 작용하는 마음을 통해서 보면 더 쉽다는 말입니다. 육조 스님은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고 해서 ‘작용하는 마음을 알아서 본성을 봐 버려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8. 돈오(頓悟)
 
선지식아 내가 홍인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번 듣고 언하에 대오하여 몰록 깨달아서 진여본성을 봄이니라.

육조 스님이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으면서 오조사에 머물렀으니까, 사실 한 번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육조 스님이 다른 스님들보다 깨달음이 빨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진여본성을 손이라고 할 때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는 손바닥만 보고 손등을 못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형상은 누구나 다 보지요. 그런데 형상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본래 갖추어져 있는 그것을 보라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집니다. 첫째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지만 않아도 스트레스의 90%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도 100%없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여본성은 형상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고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형상만 보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보게되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서 자연스럽게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 개공인줄 알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말입니다. 본질을 보게 되면 그 자리에 밝은 해가 나오듯이 지혜가 나와서 아주 지혜롭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거리로 다니면서 가르치신 것이 본질을 보라는 것이었고, 부처님 이후의 모든 스님들도 이거 하나 알기 위해 출가하고 수행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불자님들도 이것을 알기 위해 절에 와야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실 불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에 보시하기를 백천만겁동안 하더라도 본질을 보는 공덕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본질을 보게 되면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몸짱, 얼짱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빈부와 학벌을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긴 것은 긴 것 대로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체가 없고 공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알면 이렇게 비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교하지 말라고 하면 안됩니다. 비교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육조 스님이 홍인회상에서 언하에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이 분 역시 형상만 보다가 본질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조 스님의 법문을 듣고 본질이라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 후로 글을 못배우고 가난하게 산 것이 전혀 흉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어 당당해 지셨습니다. 그리고 행복해졌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진여본성, 즉 본질을 보기 위해 육조단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이 가르침의 법을 갖고 후대에 유행해서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록 보리를 깨달아서 각각 스스로 본성을 몰록 깨닫게 하느니라.

결국 우리의 본성하나 보자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고 하니까 또 거기에 집착을 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자는 모름지기 대선지식을 찾아 지도를 받아서 견성할지니라.

혼자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라도 들어야 내가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있음을 알고, 그 본성을 보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저 앞에서부터 계속 본성 이거 하나놓고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야기는 하나입니다.

무엇을 대선지식이라 이름하는고. 최상승법이 바른 길을 곧게 보인 것임을 아는 것이 대선지식이며 대인연이다.

본질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최상승법은 바로 걸어가는데, 지금은 형상만 보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게 있다고 집착해서 바로 걸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하니까 또 남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다’‘너다’를 갈라놓고 보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 이익이 되게 하려고 계속 노력합니다. 그 노력도 정당하게 하면 되는데 노력이 지나쳐서 남을 해치고 빼앗기도 합니다. 집착이 강하면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이것이 바른 길임을 곧게 보이는 것을 아는 것이 대선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아는 분이 대선지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소위 교화하고 지도하여서 부처를 보게 함이니, 일체 선법이 다 대선지식을 인해서 능히 일어남이니라.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본성을 보게 되면 모든 선법(善法)이 거기서 나옵니다. 모든 선법이라는 것은 ‘나다’‘너다’하는 양변을 여의어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내가 있고 너도 있고, 주관과 객관이 벌어진 상태로 집착해서 하는 사고나 행위는 악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모든 선법이 대선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이 선지식은 밖에 있는 선지식으로 봐도 되지만 내 마음속의 선지식으로 보는 게 좋습니다. 내 마음속 선지식이 누구입니까. 그것이 본질자리입니다. 밖에 아무리 선지식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내 선지식을 봐야 진짜입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은 내 안에 있는 선지식을 보게 하는데 도움을 줄뿐이지, 그분이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시대에 선지식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선지식이 아무리 밖에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자기 선지식을 봐야되는 것입니다.

고로 삼세제불과 십이부경이 사람 성품가운데 본래 스스로 갖추어 있을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견성할지니라.

우리의 성품 가운데 모든 선법이 구족돼 있어서 하는 일마다 다 좋은 일이 됩니다. 우리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나쁜 일은 조금 억제하고 좋은 일을 해야되겠다고 생각하는데, 본성만 보면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가려가면서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해야되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존재의 원리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갖고 있으면서도 나쁜 일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괴롭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스스로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본성을 보게되면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나도 나를 대하는데 함부로 하지 않고 주변의 가족·아이·이웃사람도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내가 굉장히 위대한 존재이고 옆에 있는 사람도 위대한 존재라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면 다른 사람도 역시 나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옆에 있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면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고, 자기는 굉장히 존중하면서 남을 하찮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남도 자기를 하찮게 봅니다. 그래서 이 본질을 알면 내가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물건 사람 모두 것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되고, 그러면 함부로 폭탄을 갖다가 퍼부어서 대량으로 살상하는 짓은 못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내 존재뿐 아니라 모든 주변의 존재라든지 물건 그리고 사람이 정말로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로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사회 역시 살기 좋은 사회가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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