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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소헌왕후

기자명 법보신문

세종 ‘월인천강지곡’ 왜 지었나?
‘불교 임금’ 표방 후 아내의 극락왕생 발원
사랑의 위대함 보인 조선 최고의 커플

 

동화 속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들은 대개 갖은 고난을 겪다가도 마지막에 이르면 멋진 왕자를 만나 듬뿍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공주나 왕비 중에는 행복하게 살다간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또는 인간의 삶에서 행복은 잠시 고통을 가리는 커튼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네들은 고귀한 지위를 가졌음에도 늘 깊은 슬픔과 고독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가장 흔한 방법은 내탕금을 보시해 불사에 동참하거나 명산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일평생 불경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불행한 여인들로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그런 식이라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불행하지 않았던 이는 단 한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과 즐거움 사이를 무수히 회전하는 롤러코스터 속에서 스스로 단련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해준 명제이다. 종교가 고(苦)의 의미를 깨달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더욱 가까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는 관점에 따라 매우 행복한 여인일 수도, 아주 불행한 여인일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시대 왕실 여인 중 남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린 조선 최고의 왕비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국모’의 지위로 인해 그는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친정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고, 오직 자신만을 끔찍이 아끼던 지아비의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 나누어야만 했다. 그녀는 개국한지 50년이 채 되지 않는, 아직 모든 것이 불안정한 나라의 왕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헌왕후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괴로움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정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시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의 사랑을 끝까지 믿고 의지한 그녀를 남편 세종은 물론 시아버지 태종도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통과 싸우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스스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원래 왕비 후보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었다. 1408년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열네 살의 나이에 혼인을 했지만, 남편이 양녕대군 대신 왕이 되는 바람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왕비가 되면서 가장 의기양양해진 이는 그녀의 아버지 심온이었다. 하루아침에 부원군이 된 심온은 태종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채 천하를 손에 쥐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태종이 부인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을 남김없이 제거한 이유가 단지 왕후의 투기와 권력욕 때문이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태종은 국가의 권력이 왕실, 특히 왕 한 사람에게 집중돼야 한다고 확신했고, 호시탐탐 아들의 외척세력까지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심온이 명나라 사은사로 떠나면서 한양이 떠들썩할 정도로 위세를 과시하는 모습을 본 태종은 세종을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마음을 굳혔다. 이 무렵 세종은 경복궁을 지키는 금위군의 군사를 나누어 상왕의 거처인 수강궁과 경복궁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까지도 군사권은 상왕인 태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심온의 동생이자 소헌왕후의 숙부인 심정이 ‘나라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상왕이 처리한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태종은 이를 빌미로 청송 심씨 가문을 공격했고, 심온을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했다. 심정과 심온은 왕실을 능멸한 대역죄인으로 몰렸다.

결국 심온은 명나라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압송되어 수원에서 자진을 명받았다. 소헌왕후의 어머니 안씨는 관노비로 전락했다. 심정은 이미 죽임을 당한 후였다.

소헌왕후는 친정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도 속수무책이었다. 태종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세종 또한 왕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심온의 제거를 부추긴 조정의 신하들은 소헌왕후의 폐출까지 강력하게 들고 나섰다. 태종 사후에 들이닥칠 왕비의 복수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세종과 금슬이 너무 좋고, 내조의 공이 많은 데다 많은 자손을 생산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태종에게 있어서 소헌왕후는 ‘덕성이 나뭇가지처럼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아주 흡족한 며느리였다.

소헌왕후를 내치는 대신 태종은 세종에게 왕비 이외의 다른 여인들을 들여 또 다른 자손들을 생산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종은 단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을 정도로 오직 왕후만을 사랑했다. “주상은 한 여인의 지아비가 아니라 일국의 왕이다. 종친이 튼튼해야 국가가 바로선다”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요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세종은 여섯 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자신의 남편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소헌왕후는 후궁들을 질투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외명부의 수장으로서 공명정대하게 그들을 대했다. 그럼으로써 후궁과 왕실 종친들의 존경을 받고, 남편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왕실은 전무후무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현명한 처신은 자신의 운명을 폐비로 전락시키지 않는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단단한 차돌처럼 평생을 절제하고 인내해온 그녀를 무너뜨린 것은 어린 자식들의 죽음이었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스무 살 안팎의 나이로 잇따라 요절하자 소헌왕후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몸져누워버렸고,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446년 3월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뒤 세종은 왕비를 위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찬불가를 손수 지었다. 훈민정음으로 쓰인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 ‘월인천강지곡’은 평생 눈물과 한을 삼키며 불법에 의지해 살아갔던 부인을 위해 지아비가 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선물이었다. 왕이 직접 찬불가를 짓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짓도록 하자 조정의 신하들, 특히 집현전 학사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오늘 불경을 만든다면 내일은 틀림없이 그 불경을 강설하는 법회를 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불교행사를 벌이는 것은 단지 한때의 일에 지나지 않겠지만, 만약 불경을 만들게 된다면 그것은 자손만대까지 전해지는 것이므로 후손들은 아무 임금이 해놓은 일이라고 할 것이며, 이로 인해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세종의 의지는 완강했다. 게다가 경복궁 내에 내불당을 건립해 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세종은 공공연하게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이다’라고 말하고, “이는 국가의 일이 아니라 짐(朕) 개인의 일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신하들의 줄기찬 반대를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에는 신하들도 세종의 고집 앞에 반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의 행보를 보면 소헌왕후가 무엇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한 나무 안에서 피어난 잎들과 가지들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넘어선 의리와 신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지순무구(至純無垢)한 사랑 앞에서 원망의 생채기는 뿌리내릴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은 소헌왕후 생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우리 조정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 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후대의 사가들이 한국 최고의 성군을 만든 인물이 바로 소헌왕후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만큼 그녀의 내조가 세종에게 커다란 버팀목이자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이상세계를 표방하던 세종이 왕비를 잃은 후 불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그녀에 대한 세종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의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헌왕후가 세종의 후궁들을 질투하지 않았던 것도, 친정 집안을 구하지 못했던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남편에 대한 믿음, 남편의 지극한 사랑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신의는 아내와 남편 모두를 보다 완성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원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원력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이어졌다. 세종과 소헌왕후, 그들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웅변으로 보여준 조선 최고의 커플이었다. ‘불멸의 사랑’이란 바로 그런 사랑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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