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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청량사 주지 지 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매끈한 머리 만지며 수행자 하루 엽니다

지현 스님은 오늘도 어스름한 새벽,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삭발한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걸리지 않고 매끈하다. 손에 감촉이 걸리는 순간 그리운 음성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지현아, 네 머리는 만져봤느냐. 진짜 만져 봤어”.

스님에게는 요즘 부쩍 소천 노스님의 말씀이 자주 들린다. 이미 30년 전에 열반에 드셨건만 세월이 갈수록 노스님의 체취는 더욱 그리움을 더한다. 스님은 노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2년간을 시봉했다. 그때 공양을 들고 방에 들어서면 노스님은 어김없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지현아, 머리는 만져봤느냐”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삭발한 머리를 만져서 뭣 하겠다는 말씀인지. 스님은 그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아침에도 만져봤는데요.” 그도 귀찮으면 “예”.

어린 마음에 노스님의 질문은 너무 실없어 보였다.

출장법회로 지역인과 화합

노스님이 속세와 인연을 접은 지 십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우연히 머리를 만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현아, 머리는 만져보았느냐.” 잊혀있던 노스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사방으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소천 노스님께서는 금강경과 원각경에 대해서는 당대 일인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스님이셨습니다. 젊은 시절엔 독립운동도 하셨으니, 그 담대함은 미뤄 짐작이 가능하지요. 스님은 항상 머리는 만져봤냐고 물으셨어요. 어린 나이에 혹시 늙으셔서 노망이 드셨나 의심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어느 날 머리를 만지다 문득 그 말씀이 떠올라요. 동시에 화두가 풀리듯 머리가 멍 하더군요. 노스님의 말씀은 다른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스스로 수행자임을, 자신이 스님임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뼈아픈 경책이었지요. 매일 묻는 그 질문에 얼마나 많은 자비와 사랑을 담았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지요.”

2년 4개월. 남다른 열정을 바쳤던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라는 중책을 훌훌 털고 경북 봉화 청량사로 내려간 스님에게선 여유로움이 진득이 묻어났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써 내려간 아름다운 글들을 모아 작은 수필집을 내 놓았다. 『사람이 살지 않은 곳에도 길은 있다』.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노스님의 말씀을 경책 삼아 인욕하고 수행했던 지난 세월의 흔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일지도 모른다.

경북 봉화 청량사. 지금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사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폐허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험준한 곳에 자리 잡은 데다 산나물이나 캐다 파는 가난한 오지다 보니, 절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던 탓이다. 그런 그곳을 스님은 20년 만에 경북 북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량으로 환골탈태 시켰다. 있는 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만들었다. 마치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듯이.

“처음엔 그저 평범한 절이거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절에 도착해보니, 정말 말이 아니더군요. 건물이라고는 대웅전 하나 달랑 있는데, 기와에는 풀이 무성하고,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비가 오면 양동이를 여러 곳에 받쳐놔야 했지요. 쌀도 없고 덮을 이불도 없었으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법당에서 촛불을 켜고 앉으면 절로 서글픈 생각이 일었다. 그래도 묵묵히 견뎠다. 여기서 도망치면 다른 곳에서도 견딜 수 없지 싶었다. 혼자서 기도하고 밥 해먹고 남은 시간엔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터를 닦았다. 꼬박 1년 7개월. 이듬해 초파일엔 법당에 고작 27개의 등이 걸렸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행도 중요하지만 수행을 할 수 있는 도량을 여법하게 갖추는 것도 수행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이 오지 않으면 원효 스님처럼 직접 찾아가자 이렇게 결심했지요.”

스님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농사일로 바쁜 지역민들이 귀한 시간을 쪼개, 절에 올 수 없으니 직접 찾아갔다. 이름하여 ‘출장법회’. 처음엔 마을반상회부터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굴이 익자 함께 고추를 따고 풀을 베는 등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이내 걸망을 지고 직접 마을을 돌며 회관을 얻어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특히 농사일이 바쁜 날엔 아이들이 문제였다. 스님은 없는 살림을 쪼개 경운기를 구입, 마을과 골짜기를 누비며 아이들을 모아 절로 데려왔다. 놀다가 해가 지면 보내 주기를 꼬박 4년. 마을 사람들은 점차 스님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현’이라는 법명 대신 ‘경운기 스님’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은 것도 이즈음이다.

10년 불사로 도량 중창

“법회를 간소화하는 대신 찬불가를 부르고 율동을 하는 등 다양한 재미를 더했습니다. 지루하다 싶으면 가요도 불렀지요. 또 남은 시간에는 마을 현안을 논의하는 등 이웃 간의 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으로 채웠더니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해요. ‘출장법회’는 말 그대로 히트 상품이 됐지요.”

점차 마을 사람들과 돈독한 정을 쌓아가고 있을 즈음 여든살은 족히 돼 보이는 노보살이 아들의 등에 업혀 청량사에 들렀다. 죽기전에 청량사를 꼭 들르고 싶었다는 노보살은 스님을 보자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를 내놓았다. 모두 10만원. 지폐 주변이 닳은 것으로 미뤄 수십년은 속주머니에 간직한 돈이지 싶었다.

“다 헤진 돈을 받는데 코끝이 찡하데요. 내 손에 놓인 것이 돈이 아니라, 노보살의 신심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쓸 수 없었어요. 그래, 다음에 오면 여법한 법당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구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도량 불사를 시작했지요.”

불사는 대웅전의 기와 불사부터 시작됐다. 돈이 없어 영주, 봉화, 안동 인근을 돌며 헌 기와를 모으고, 헐리기 직전의 집을 찾아 기둥이며 서까래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를 절까지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파른데다, 차나 기계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량사 법당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다른 전각을 들일 공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스님은 공사를 하기 전 축대를 쌓아 도량의 터를 확보하고, 길을 닦았다. 그래도 불사 과정에 경운기가 전복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자재를 지고 올라갈 길이 없어 1년 가까이 창고에 쌓아둬야 했습니다. 그래도 불사를 시작하니 많은 사람들이 팔을 걷고 돕기 시작하더군요. 특히 널매 보살이라는 분이 있는데 혼자서 300집을 돌며 권선을 해오셨습니다. 대단한 정성이지요. 권선문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는데 500원, 1000원, 5000원 십시일반 정성의 흔적들이 가득 담겨있지요.”

선불장이 들어선 터는 대웅전보다 2m 이상이 높아 혼자서 꼬박 1년을 땅을 파 터를 닦았다. 이렇게 주변의 돌이며, 나무 한그루까지 스님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열성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자 관세음보살이 감응을 했는지 천수(千手)를 빌려주기 시작했다.
 
불사특공대 5인조의 등장이다. 절 인근에 사는 이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나와 기와며 모래를 져 날랐다. 나중에는 자녀들까지 불사에 동참했으니,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현한 듯 했다. 꼬박 10년. 하늘에 걸린 듯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하는 도량, 청량사의 탄생은 이런 선재들의 인연화합으로 가능했다.

스님은 헌신적으로 불사에 동참해 준 지역민들의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지난 2001년 산사음악회를 열었다. 장사익, 안치환, 한영애 등 인지도 높은 가수들이 등장하자, 도량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이날 관객은 무려 4000~5000명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천주교, 원불교 등 타종교와 함께 산사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매년 산사음악회를 여는데 많을 때는 8000명까지도 참석하지요. 특히 전국에서 대거 사람이 몰리는 까닭에 지역의 경제활동에도 많은 보탬이 되고 있어요. 올해에는 장사익씨가 뉴욕에서 했던 공연을 그대로 무대에 올릴 예정입니다.

스님은 최근 청량문화연구회 활성화에 공력을 쏟고 있다. 안동탈춤 전수자, 장승 조각가, 귀농 청년 등 14명으로 구성된 회원들은 스님을 중심으로 지역의 발전을 위해 굵은 땀을 흘리고 있다. ‘청량지’라는 잡지를 발간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농민들의 시와 수필, 산문 등을 싣고 있는데, 지역 내 반응이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고답적인 일반 잡지와 달리 살가운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담아 커다란 공감대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또 공민왕에 얽힌 다양한 전설을 담고 있는 지역 정서를 감안, 옛 모습 그대로의 공민왕 어가행렬과 당제를 복원하려는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청량문화연구회에는 6명의 귀농청년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농촌 살리기도 병행하고 있는데, 3만평의 밭에 감자를 공동으로 재배하고 마을마다 어린이 공부방 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지요. 사찰의 기반이 농촌인 만큼 농촌이 살지 않으면 불교도 살 수 없지요.”

소천 노스님은 82세로 돌아가시기 전 3년을 장좌불와로 견뎌냈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커다란 고통을 겪었지만 열반에 들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노스님은 말씀하셨다.

‘산사음악회’로 지역문화 선도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수행자라면 죽는 모습만큼은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나.”

근래 들어 노스님의 말씀이 갈수록 무게를 더하는 것은 지현 스님의 삭발한 머리에도 하얀 눈꽃이 조금씩 피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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