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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일호 진묵 대사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와 자비로 중생에게 다가서는 그 모습이 부처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든 누군가에 대한 설화든 그 이야기 속에는 기록하고 말하는 이들의 ‘관점’이 깊게 깔려있다. 또 그 ‘관점’은 곧 쓰고 말하려는 ‘의도’와 만나 사건에 대한 나열과 함께 다양한 해석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옥 진묵(一玉 震默, 1562~1633) 대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관점’과 ‘얘깃거리’를 제공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지난 수백 년간 전설이 전설을 낳고 얘기가 얘기를 낳으면서 심지어 실존 인물이 맞느냐 하는 의문까지 제기될 정도다.

초의 스님의 『진묵조사유적고』와 『동사열전』에 따르면 진묵대사는 1562년 전북 만경의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대사의 가족은 어머니와 누이가 있었으며, 7세에 전주 봉서사로 출가했다. 천성이 슬기롭고 자비로운 대사가 태어나자 주위에서는 “드디어 불거촌에서 부처님이 나셨다”고 찬탄했다고 기록돼 있다.

어린 나이에 출가자의 길을 선택한 대사는 경전을 읽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었고, 한번 눈에 스치면 외워 아무도 그의 스승이 되어주지 못했다. 대사가 봉서사 동자승으로 있었을 때 사중에서 그에게 신장단에 향불을 사뢰는 소임을 맡겼는데 하루는 주지 스님의 꿈에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도리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예경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그분이 다시는 향을 올리지 말도록 해 우리를 편안케 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로 고려말 나옹 스님과 더불어 부처님의 현신으로 받들어지는 스님이다.

대사는 홀로 선과 교를 닦아 구경각을 이룬 뒤 승속을 넘나들며 중생들을 교화했다. 만년에는 봉곡 김동준 선생과 교류하면서 비록 서로 다른 신분이지만 정신적인 교류를 하기도 했다. 특히 대사는 효심도 깊어 어머니를 자신이 거처하는 암자부근에 모시고 극진히 봉양했으며, 한 번은 모기가 극성을 부려 어머니가 고통을 겪자 이를 안쓰럽게 여겨 신령에게 부탁해 모기를 쫓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힘없고 굶주린 백성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일생을 살았던 대사는 1633년 10월 28일 세수 72세에 앉은 채로 적멸의 세계에 들었다.


▷스님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의 스님의 글에 전하는 대사님의 일화 20여 편을 비롯해 여기저기 수많은 설화들이 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구체적인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초의선사는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허공에 핀 꽃 같은 게 삶인데 자세히 기록한다고 한들 그게 내 진면목이라 할 수 있겠나. 그저 보는 이들이 보고자 하는 대로 볼 뿐인 게지.”

▷아무리 그래도 신라나 고구려 때도 아니고 불과 몇 백 년 전인데도 실존인물이 맞나 안 맞나 논쟁하는 게 참 드문 경우 아닙니까?
“허허 그래, 그러면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고.”

▷사실 저도 반신반의합니다. 다만 초의 스님이 대사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전(傳)’이 아니라 ‘고(攷)’라고 한 것은 사실임을 확신했다는 거고, 또 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도 스님의 존재를 인정했으니 저 같은 범부야 어찌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믿을 뿐이지요.
“그래서 무얼 믿는다는 겐가. 또 실존여부가 왜 그리 중요한 일인가.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실존인물이어서 중생들에게 의미가 있는 겐가.”

▷아무튼 대사께서는 민중들 사이에게 불교적 인물인 동시에 신이한 영웅, 심지어 미륵불의 현신으로 받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원불교나 증산교에서도 대사를 부처님으로 받들고 있고요. 아마도 이는 대사께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성속을 초월한 거리낌 없는 삶을 사셨기에 그리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술을 좋아했고 고깃국도 먹었다는 것은 일종의 파계 아닌가요?
“계율을 어기면서 살면 어떤 수행자라도 인심을 얻을 수 없네. 그러면 교화도 불가능한 게지. 허나 거꾸로 계율만을 고집하고 산속 선방 문고리에 손때나 묻히며 들어앉아 있으면 교화가 어찌 되겠나. 그렇기에 세간과 출세간을 넘어선 출출세간의 삶의 살아야 하는 게지. 어떤 행동이든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어지면 파계도 곧 지계(持戒)라는 말일세.”

▷그러면 대사님과 관련된 얘기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중태기와 관련된 대사님의 설화를 보면 유생들이 물고기를 잡아 끓이고 있는데 지나가는 대사께 물고기를 먹을 거냐고 빈정거렸답니다. 그 얘길 듣고 대사께서는 좋다며 그 뜨거운 솥단지의 물고기국을 모두 마셔버렸습니다. 그런데 대사께서 물가에 가서 대변을 보니 물고기가 모두 살아서 나왔고, 그 뒤 유생들이 대사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나요?
“그 자리를 외면하고 지나간다면 나야 깨끗하다 할 지 모르지만 유생들이 불교를 바라보는 생각은 변하지 않고 또 계속 그렇게 살지 않았겠나. 계율을 어기면서 고깃국을 먹고 살려낸 것은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였네.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게 유교냐 불교냐 하는 것보다 어떤 행위가 정말 바람직하고 지향해야 하는 건가가 중요하네. 이 얘기의 사실 유무에 주목할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한 백성들에 눈에 비친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돌이켜보아야 하네.”

▷대사님 설화에는 유학자였던 봉곡 선생과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그 중에서도 저는 대사께서 봉곡 선생과 도력시합을 했던 부분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대사께서 양반인 봉곡 선생을 찾아가 『강목』을 빌린 뒤 절로 돌아가면서 읽고는 길에 버렸습니다. 이것을 안 봉곡 선생이 찢어진 책을 그대로 가져오라고하자 대사께서 책을 원상태로 해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대사께서는 왜 책을 빌려 읽고 찢었나요? 설마 탁월한 암기력이나 신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양반인 봉곡 선생과 천민 취급 받던 승려가 가까이 지냈다니 사람들이 호기심을 일으켰지. 봉곡 선생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권위적이고 형식화 된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양반일세. 내가 책을 빌려 찢은 건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잊으라는 간곡한 뜻이었네. 그가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주자강목』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거기서 구현된 현인, 성인의 세계를 만들어가라는 거였네. 봉곡 선생이 그 우상을 타파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그는 권력과 신분으로 군림하고 억압하는 양반에 불과할 뿐이네. 당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통과 힘겨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지. 젊은 사람은 전쟁터에서 죽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굶어죽고…. 백성들은 내 얘기로 양반사회에 대한 원망과 바람을 담아 이런 얘기를 전하지 않았겠나.”

▷다른 세계를 배제한 삶을 살지 않았던 초의 스님이나 다산, 추사 같은 분들이 스님을 존경했던 이유를 알겠네요.
“하나를 고집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배제되네. 부처님께서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괴롭힐 뿐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싸우려 하지 않고 지혜와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게. 평화는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끝내는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네.”

▷스님께서는 당시의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법맥이나 법통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열반을 앞두고 한 제자가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어느 법통을 이었다고 할까요?”라는 질문에 “내가 무슨 법통을 잇고 말고 할 게 있는가”라고 답변하셨다는 걸 보면요.
“법통이란 것도 마찬가지일세. 그 법을 이 사바세계에 드러내면 그만이지 무슨 법통을 일일이 따지나. 그건 내가 곧 주인공이라는 선의 정신에 철저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게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나 불자의 모습일까요?
“출재가를 떠나 진정으로 수행하는 이는 부처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과 억압으로 굴레에서 신음하는 중생을 외면해서도 안 되네. 스스로 부처가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혜와 자비로서 중생에 다가설 때 다름 아닌 부처일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초의집』, 한기두 「진묵의 법풍」, 김방룡 「진묵조사의 생애와 사상」, 김명선 「진묵대사 설화 연구」, 고석훈 「진표·진묵이야기의 특질과 전승양상」 등

진묵 대사 어록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삼아 산을 베게로 삼아/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 삼아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거나하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진묵대사소전 중)

“저 영산에 사는 어리석은 나한아/ 백성의 잿밥만 좋아하니 언제 그치랴/ 그대의 신통한 묘용에는 비록 미치기 어렵지만/ 대도(大道)는 응당 나에게 물어봄이 어떤가?” (진묵대사소전 중)

“열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슬하에서 삼년 동안 길러 주신 은혜 잊을 수 없습니다. 만세 위에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한데 백년 생애도 채우지 못했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 표주박 하나 들고 길거리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녀 꽂고 규중에 처해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은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불공 마치고 단(檀)을 내려오니 앞산 뒷산만 첩첩한데 어머님은 어디로 떠났습니까? 아! 서럽고 애달프구나.” (진묵대사소전 중)


찬탄과 공경

“우리 대사는 마치 저 바닷가 모든 냇물을 마시고 저 대지가 모든 산을 다 떠받는 것과 같이 모든 방면에 능통한 분이다.” (조선후기 초의 스님)

“진묵(震默)은 그 이름이 표했듯이 이 땅에 소리와 흔적 없이 다녀간 거인이었다. 천지와 함께 하는 트인 사람일지나 밖으로 넘치지 아니하였고 속 깊은 공부를 하고 있으나 현실의 여러 상황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대원(大願)을 가졌으나 중생의 원을 들어주는 가운데 세웠고 발원과 수행을 초월했으나 대의는 역연히 지켜왔으며 신통과 이적이 자재했으나 법과 질서는 분명히 지켰다.”
 (한기두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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