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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정희왕후 윤씨

기자명 법보신문

남편 죄업 씻으려 불사 매진했던 조선의 대화주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의 정비
전국의 수많은 사찰 불사 주도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한 대비

현재까지 전해지는 불화나 불상 중 최고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은 대개가 왕실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화주가 되어 최고의 작가들로 하여금 불국토를 향한 서원을 발원하게 했으니 그 시대 최고의 작품이 탄생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큰 사세를 유지하고 있는 큰 절들이 거의 왕실 원당이었다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받던 그 시절에도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들은 유생들이나 관아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보호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불사들이 주로 왕실 여인들의 정치적·경제적 비호 아래 이루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최고의 대화주를 꼽으라면 단연 정희왕후를 들 수 있다. 그녀는 해인사에서부터 원각사, 상원사, 신륵사, 용문사, 낙산사, 봉선사, 회암사 등 수많은 사찰의 창건과 중건에 관여했다. 그런데 그녀가 조선시대 최대의 화주로 이름을 남긴 데에는 그럴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인 세조 또한 조선 최고의 호불군주(護佛君主)로 꼽힐 정도로 독실한 불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호불을 내세웠던 가장 큰 이유는 세조가 유교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유교적 명분론 내에서는 결코 인정받을 수도 인정되어서도 안 되는 패륜아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스스로 주공(周公)이 되겠다고 만천하에 약속한 세조는 4년 만에 그 약속을 번복하고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었고 뒤이어 자객을 보내 주살까지 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을 부정하는 유교 대신 불교적 이상세계를 표방하는 군주임을 자처했다.

남편이 불교를 옹호하는 정책을 펼치다 보니 정희왕후 또한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다른 왕비들에 비해 정희왕후의 이름이 유난히 사찰의 중창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자신의 불교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두 번째 이유로는 정희왕후 개인의 불행을 들 수 있다. 정희왕후는 살아생전 남편과 자신이 낳은 세 자식을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세조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첫째아들 의경세자(후일 덕종으로 추종)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위에 오른 둘째아들(후일 예종)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으나 1461년 세자빈은 아들을 낳은 지 산후 5일 만에 죽었고, 원자 또한 2년 뒤에 죽고 말았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1468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예종 또한 보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었다. 8년 뒤에는 외동딸 의숙공주마저 요절했다.

의경세자가 죽기 전에 항상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권씨의 악몽에 시달렸으며,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침을 뱉자 세조의 온몸에 종기가 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야사로 전해온다.

자식들이 연달아 죽고, 남편이 피부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희왕후는 남편의 손에 죽은 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될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자연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고, 세조는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와 황보인에 이어 단종복위운동을 벌인 사육신들을 죽인 다음, 결국 자신의 조카마저 비참하게 죽였다. 그런데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연달아 자식들이 죽어갔으니 어찌 이를 무참히 죽어간 원혼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랴. 게다가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백성들 또한 품지 않을 리 없으니, 만에 하나 하늘이 버린 왕실이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세조는 물론 조선왕실의 존립조차 확신할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죄의식과 위기감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더 불사에 열중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업보를 갚기 위해 불사에 열을 올렸다. 세조가 몸져누웠을 때 그녀는 속리산으로 신미 스님을 찾아가 고통을 호소했고, 스님은 그녀에게 오대산 중턱에 절을 지으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절이 바로 오대산 상원사이다. 또 왕실의 불행을 막아보기 위해 세종의 무덤을 여주로 이장하고, 부근에 폐사한 절을 중창해 신륵사를 세웠다.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섭정의 지위에 오른 대비였다는 점 또한 그녀가 대화주로서 명성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이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자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성종으로 세웠다. 당시 열세 살에 불과했던 어린 군왕 대신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왕권의 대행자가 된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전국 명산대찰의 불사를 지원했고, 불경을 편찬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불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정희왕후는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물론 세조와 정희왕후가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한 독실한 불자였다고 해서 그들이 지은 악업마저 모두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이 악업을 갚기 위해 불교를 독실하게 믿은 것이라고 해서 그들이 지닌 신실한 불교신앙까지 과소평가하는 것도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불자인 이상 그들 또한 선업의 결과는 선업으로, 악업은 악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이치를 잘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권력의 생리를 좇았던 야심가들이었고, 욕망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작은 善’을 무시하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불교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에게 닥친 크고 작은 불행들은 외려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이 평생토록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자신들의 악업에 대해 고민하거나 자신들의 소행을 후회할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조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후회했는지, 후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세조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깊이 참회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참회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고 싶었던 세조의 또 다른 욕망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불교 유산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번뇌와 고통이 배어있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불국토를 향한 지극한 마음, 청정한 기도가 한국 불교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뿌리라면,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 또한 한국 불교를 성장시킨 이파리와 가지에 해당할 것이다. 욕망을 쟁취하거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세속적 신앙이라고 해도 전혀 무가치한 일이라고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희왕후가 지원한 수많은 사찰들은 오늘날까지 많은 스님들의 수행처로, 현대인들의 불심을 키우는 도량으로 그 법통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그것이 악업의 산물이든 선업의 산물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역사는 그 매듭을 딛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속성을 갖고 있음을 웅변이나 하듯이.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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