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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의왕 용화사 주지 덕 문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도심 사찰은 편안한 쉼터 삶의 쉼표같은 공간 돼야”

도심 포교당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신도의 많음, 일사불란한 조직, 재정의 튼튼함, 이런 것들이 이심전심 통하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덧붙여 건물의 규모가 돈으로 환산되는 도심의 특성을 감안하면 건물에 매겨지는 값어치도 포교당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일 터이다.

그러나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자리한 미륵도량 용화사는 이런 물욕적인 가치 기준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신도를 줄이려는 스님, 자율로 움직이는 신도회, 언제나 빠듯한 절 살림. 그럼에도 용화사는 성공한 도심 포교당의 대표 사례로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등록신도가 대략 4000가구 정도이고 이 가운데 매달 한번 이상 사찰을 찾는 진성 신도는 1500가구 가량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아요. 포교당 스님이라면 신도들의 가정사는 물론 부엌의 숟가락 수까지 꾈 수 있어야 하는데, 신도가 많다보니 정성을 쏟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 1000가구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공간에 따른 적정 신도 비율이란 게 있다. 공간에 비해 신도가 너무 과하면 원활한 신행활동이 어렵다. 또 스님과 신도 간에 친밀한 교감이 흘러야 하는데 숫자가 너무 많으면 인간적 유대 관계에 적잖은 장애가 생긴다. 그러다보면 사찰은 인간미 없는 삭막한 종교시설로 전락하거나, 뜨내기 신도들만이 가득한 기러기 도량이 되기 쉽다.

이러니 신도가 사찰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덕문 스님에게 신도의 많음은 오히려 사찰 운영의 어려움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도심 사찰은 도시민의 편안한 쉼터가 돼야 합니다. 세속적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부처님을 만나고, 도반들과 정을 나누고, 스님에게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돼야겠지요.”
용화사는 도심 포교당에 대한 스님의 독특한 삶의 철학이 건축물로 형상화 된 곳이다. 운영 뿐 아니라 도량의 외향에도 신도들과 지역민을 생각하는 스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표리(表裏)가 일치하는 도량이라고나 할까.

용화사에 첫발을 들인 이들은 한결같이 그 아름다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잘 꾸며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른 듯 고풍스러운 듯 아기자기한 자태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의왕의 대표 도심포교당

붉은 황토로 치장한 건물은 일주문 대신 중앙에 넓은 통로를 내어 천정에는 단청을 두르고 양 옆으로 무서운 사천왕 대신 천진난만한 16나한상의 황토부조를 붙였다. 나한문을 지나면 솟대와 소나무, 석탑과 석등, 수각들로 꾸며진 고풍스런 뜨락이 눈에 들어오고, 한쪽 벽면엔 한옥 기와 절편과 전돌 등을 이용, 산과 바다를 조각했다. 건물 입구, 선으로 그린 작은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뒤로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로 인테리어 된 작은 계단을 따라 선화와 글씨, 철과 나무를 사용해 만든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차례로 얼굴을 내밀고, 대웅전과 미륵전, 관음전과 요사채, 산신각과 황토찻집이 층별로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특히 스님과 신도들의 만남의 장소인 황토찻집은 둥근 버섯 모양의 공간으로 뒤에 이어진 모락산을 배경으로 도심 속 산사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여러 번 매스컴에 올랐던 지하 공양간은 퓨전 갤러리다. 조리실까지 툭 터진 정갈한 모습이 인사동 여느 갤러리 못지않은 깔끔함을 선보이고 있으며 공양실의 벽면에 전시된 수준 높은 작품들은 절을 찾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도심 포교당의 한계를 극복한 아름다운 조경, 편안한 신행 공간,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아늑한 쉼터. 세련미, 공간미, 조형미, 편안함, 넉넉함이 버무려져 조화를 이룬 ‘꿈의 도심 포교당’을 덕문 스님이 아파트 숲 한복판에 창조해 낸 것이다.

“용화사는 안양, 의왕 지역에서 유일하게 종교부지에 들어선 사찰입니다. 그러나 종교부지를 교회 기준으로 잡다 보니 사찰이 들어서기에는 장소가 턱없이 부족해요. 용화사의 터도 220여 평 정도로 협소할 뿐 아니라 그나마 세모꼴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협소한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포교당을 계획하게 됐습니다. 측면에 남은 자투리 공간에 철재 조각품이나 나무 작품들을 비치하니 근사한 전시실이 따로 없더라고요.”

미술관 같은 인테리어 인기

마치 도깨비 방망이로 요술을 부린 듯 아름다운 도량이지만 용화사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시련이 적지 않았다. 맑은 사찰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스님은 각종 소송과 재원 마련의 막막함, 주변의 불신, 불사 중단까지. 속된 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 같은 시간을 겪어야 했다.

“용화사 주지로 부임한 1999년 이후 근 6년간을 베개에 머리 붙일 겨를 없이 치열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소송만 20여건을 넘게 하고, 검찰청을 문지방 닳듯 드나들어야 했지요. 건설회사의 갖은 협박과 고소 고발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간에 도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지요. 도량을 허공에 날려버릴 수 없었고, 무엇보다 신도들의 정성을 헛되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의지하며 굳건히 버텼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시련은 스님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도 했다.

“용화사는 원래 안양에 소재한 본 백화점 자리에 위치해 있다가 1983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으로 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또 다시 아파트 부지로 결정이 나면서 부득이 장소를 옮겨야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터져버린 거라. 전임 주지 스님이 용화사 터를 개인적으로 팔아버리고 대금을 착복한 것이지요. 건설회사는 대금을 지불했으니, 나가라고 그러고. 그 스님은 전혀 뉘우침이 없고. 그래서 종단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시끄러우니 주지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제가 자청을 했습니다. 불의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지요.”

정작 주지로 부임했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주거 침입, 무단 점유. 경찰에서는 수시로 스님을 연행했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용화사를 구하는 것은 칼날 위에 서 있듯 위태롭기만 했다. 그러나 재판보다 더욱 큰 시련은 따로 있었다. 정작 수년간의 재판 끝에 승소를 하고 나니, 문제의 스님이 입적해 버린 것. 구상권도 청구할 수 없고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재원을 최대한 끌어 모으고, 신도들과 함께 불사 모연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전임 주지 스님이 사찰을 팔아버린 마당에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무슨 믿음이 있었겠어요. 그래도 묵묵히 따라와 줬어요.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용화사가 있게 된 것이지요. 저야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신도들이 주인일 밖에요.”

불사는 불자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도움이 컸다. 인연이 닿았던 건축가와 예술인들이 함께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스님의 불사를 도왔던 것. 스님은 평소 생각했던 도심포교당에 대한 모든 희망을 용화사에 흠뻑 담았다. 2002년 착공해, 2004년에 완공. 그러나 화창한 봄에 꽃샘추위가 찾아들 듯 공사 금지 가처분 소송으로 1년 넘는 세월을 골조만 쌓아두고 바라보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절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타 지역 사람들은 받지 않아요. 거주하는 지역의 사찰에 다니라고 권합니다. 도심 포교당은 철저하게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종회의원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은 종단의 일이 아니면 사찰을 비우지 않는다. 하루 4번의 예불을 모시고, 각종 재일과 철야정진까지, 부득이 한 일이 아니면 거르는 법이 없다. 신심도 중요하고, 교학도 중요하지만 포교에 있어 가장 큰 미덕은 정성이라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용화사는 가난합니다. 수입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굴러갑니다. 불우이웃돕기는 바자회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어린이 법회는 전문가 5명과 신도들이 어린이법회지도회를 결성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지요. 6개 팀으로 구성된 봉사팀도 안양교도소, 소년심사원, 보현의 집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찰이 굳이 부자일 필요는 없어요. 다만 신도들이 절의 주인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용화사는 매일 다양한 주제의 교육과 법회가 마련돼 있다. 불화교육, 합창, 오카리나, 요가, 기초교리, 가족법회, 거사 법회, 어린이 법회, 교도소·복지관 봉사 등 일주일이 빡빡하다. 그러나 강요는 없다. 자신의 기호에 맞게 편안한 마음으로 법회와 교육에 참여하면 그뿐이다.

‘신도가 주인’인 사찰 조성

스님은 ‘청소 스님’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포교당 인근 지역을 혼자서 묵묵히 청소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웃는 모습이 하회탈을 닮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스님의 얼굴에서 하회탈보다 미륵불을 떠 올린다. 아마도 스님의 아름다운 삶이 빛처럼 스님의 모습에 투영됐기 때문일 터이다.
 
의왕=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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