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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부자 되려거든 불교를 배워라

기자명 법보신문

19. 멸죄(滅罪)

<사진설명>혜능 스님 생가 터에 세워진 국은사 육조기념당. 육조상 뒷편에 육조단경을 설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죄를 멸한다. 죄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하는데 사실은 죄가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내가 있다고 착각해서 집착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죄도 함께 없어집니다. 선사스님들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을 없다고 알면 괴로움도 같이 없어집니다.

선지식아 후대에 나의 법을 얻는 자는 항상 내 법신이 너의 좌우에 여의지 아니함을 볼 것이니라.

육조 스님이 나의 법신이라고 했는데 이 법은 보편된 법신입니다. 이 법을 깨닫는 사람은 법신이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법신이 무엇입니까.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보면 우리를 해방케 하고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형상과 법신이 항상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도 식(識)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 그 자체도 연기현상이기 때문에 법신이 항상 따라 다닙니다. 어떤 스님들은 무아라고 하면서 무엇이 윤회하는가 하면서 모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식이 윤회를 하는데 식 자체가 연기현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식 자체도 실체가 없는 공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전부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선지식아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 원을 세우고 그것을 받아 지니되, 부처님을 섬기듯이 하라.

본문에는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갖는다고 했는데, 이 돈교 법문이라는 말은 몰록 가르치는 법문입니다. 몰록 가르치는 법문은 ‘너다’ ‘나다’를 여읜 그 자리이고 이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위로는 나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면 상구보리는 정견을 갖춰서 생활화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회화하는 것이 하화중생입니다. 이 원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시대에도 그것이 필요해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시대에는 더욱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의 자본주의는 잘못되어서 정말로 도닦기 어려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반면에 어느 시대보다 도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앞에서 내 스스로 ‘나’에 대한 가치를 알면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물건에 대한 가치를 다 안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자본주의를 고치는 길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되려거든 불교를 열심히 배우십시오. 그러면 부자가 됩니다. 그 부자는 평생 존경받고 정말로 남과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자입니다. 형무소에 가는 그런 부자가 아닙니다. 형무소에 가는 부자들은 부(富)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경전에서 ‘절약해라’ ‘절대 나쁜데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제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정견을 갖추면 가능한 일인데, 우리는 원을 세우면서도 그것이 귀중한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부처님을 섬기듯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 이것을 부처님 섬기듯 하라는 것입니다.

몸이 다하도록 받아 지녀서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오른다.

지금 우리사회는 진정한 어른이 없어서 젊은 사람들이 자꾸 어른을 무시합니다. 어른과 젊은 사람 모두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승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런 정견을 갖추어 생활화와 사회화를 열심히 하는데, 그것을 부처님 받들 듯이 하면 그분은 틀림없이 성인이 됩니다. 저는 여기서 성인이라기 보다 ‘인격을 갖춘다’고 하면 참 좋겠어요. 인격자가 없으니까 우습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른들이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다보면 나중에 또다시 젊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게 됩니다. 우리세대에서 조금씩 바로 살아가는 어른이 생기는 사회로 가야 그러한 병폐도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전해 받을 때에 위로부터 쫓아온 이래로 묵연히 법을 부촉하여 대서원을 발하고 보리에 물러서지 아니하면 곧 모름지기 분부(分付)한 것이니라.

이것은 앞의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분부(分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누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분부라고 합니다.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의지나 원력이 있지 아니하면 있는 곳곳에 망령되게 선전해서 저 앞사람을 손상시키지 말아라. 구경에는 이익이 없느니라.

정견도 갖추지 않고 사회화·생활화에 대한 의지도 없으면서 가는 곳마다 불교를 잘못 전해서 앞에 갔던 그 수많은 도인 스님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곧 정법’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사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을 받다 보니까 불교를 이해하는데 세월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중도연기로 이해하면 다양하게 다른 말로 표현했던 불교를 한번에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아는데 크게 시간을 소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중도 연기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영리한 사람들이라면 1주일이면 되지요. 또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몇 달이면 충분합니다. 중도연기를 대승경전에서 다른 말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놓았을 뿐이지 내용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 나서, 우리는 수행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것처럼 정견을 갖춘 눈으로 보고 그 갖춘 눈으로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데 시간을 보내면 행복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만 『100일 법문』을 읽어보면 중도연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존재원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게되고, 그 알게 된 내용대로 그렇게 보고, 그렇게 행동을 하면서 노력해 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염불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봉사를 하던지 해 나가면 훨씬 내 마음도 여유롭게 되고 이해심도 많아지며 또 지혜롭게 되면서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집착을 하니까 거기서부터 이런 저런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도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생각을 갖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면 충분히 잘 살 수 있고, 주변에서도 존경받는 지도자가 됩니다. 이렇게는 못될지언정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잘 살아온 스님들이나 사람들에게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해서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만겁 천생에 부처님 종자를 끊음이니라.

부처님 종자를 끊던지 말던지 나는 상관없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곱씹어 보면 부처 종자를 끊으면 점점 나에게 집착을 하게 되고 나에게 집착을 하면 내 밖에 있는 것에도 집착을 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항상 불만이 가득 차서 옆에 있는 사람을 많이 괴롭힙니다. 더불어서 자기도 괴롭힙니다. 하지만 바른 견해를 가지면 우리는 그 시간에 정말로 잘 사는 방향으로 노력하여 그것을 전환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못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불교가 동행을 해야 국가 사회도 잘 살고 개인적으로도 잘 사는 것입니다.

대사가 말하되, 선지식아 나의 무상송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자로 하여금 죄를 멸할 세 또한 멸죄송이라고 이름함이니라.

게송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게송을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불교를 잘못 믿었구나’ 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을 닦되 도는 닦지 아니하고, 복을 닦으면서 이것이 도라고 말한다.

복 닦는 것이 도라. 기복하면서 나는 불교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똑 같은 것입니다. 기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와 불교가 같이 가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에 대한 것을 열심히 생활화하면 기복은 같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도는 닦지 않고 기복만 하니까 도가 안 따라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를 닦으면 기복은 같이 따라오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좀 멀리 내다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코밑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하고 공양하는 복이 한이 없으나, 마음속에 삼업은 원래대로 있음이로다.

이것도 복은 많지만, 불교는 아닙니다. 선행은 되겠지요. 아무리 보시하고 공양하더라도 마음속에 탐진치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탐진치를 없애려면 보시를 하거나 공양을 하더라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 하면, 그게 바로 복이 되고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보시하고 봉사하고 공양하고 이렇게 하면 도와 복을 같이 닦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만 보시·공양만 하면 삼업은 그대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복은 될지언정 도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없고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알아 정견을 갖추고 행하면, 그것은 복도 닦고 도도 닦고 자본주의도 되고 불교도 되면서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만약 복 닦는 것을 가져서 죄를 멸하고자 할진대는 후세에 복은 얻을 지라도 죄를 지음이 없어지리오.

후세에 복은 얻지만 죄 지음이 계속된다는 말인데, 이것은 죄 짓는 것은 여전히 있다는 말입니다. 복을 짓고 보시·공양하더라도 정견을 갖추고 해야 그것이 수행도 되고 죄도 없어집니다.

만약 마음 가운데를 향해서 죄의 인연을 제할 줄 알면 각각 자성 가운데에 진짜 참회하는 것이니라.

죄의 인연은 ‘나다’‘너다’를 없애는 것이고, ‘나다’‘너다’가 없는 줄 알면 죄의 인연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듣는 분들은 죄의 인연을 어떻게 없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죄의 인연을 없애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죄를 제대로 없앨 수 있습니다.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이해만 하면 이해하는 그 자체가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있는 그 자체가 같이 보고 같이 행하면 그 사람이 도인이고 죄도 안 짓고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좋다’‘나쁘다’를 초월해서 절대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해하는 자체가 없애는 것입니다. 또 이해하는 자체가 복을 짓는 것이고 자유해지는 것이고 행복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해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해해서 정견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어찌 보면 참으로 쉽지만 처음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상근기가 되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이해도 못하고 잘못 수행하면서 내 인생 도둑맞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둑맞을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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