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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인수대비

기자명 법보신문

복덕 없는 지혜의 한계 여실히 보여준 일생

명군 성종의 친모이자 폭군 연산군의 조모
각종 불경 간행…산스크리트 번역도 가능
연산군 생모 윤씨 내쳐 비극의 씨앗 잉태

인수대비 한씨는 소혜왕후라는 왕비명보다 인수대비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이는 그녀가 한 번도 왕비였던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수대비는 처음부터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었다.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이 의경세자가 되었고, 그녀는 수빈의 지위에 올랐다. 시아버지의 왕위 찬탈로 그녀는 하루아침에 세자빈이 되었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던 국모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시동생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요절함으로써 그녀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예종의 아들이 겨우 4살에 불과해 적통으로 보위를 잇기 어렵게 되자 시어머니(세조 비) 정희왕후는 예종의 어린 아들 대신 맏아들(의경세자)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이때 한씨는 맏아들 월산군 대신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천거했으니, 그가 바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명군 성종이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숭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수빈 한씨는 소혜왕후라는 이름뿐인 왕비명을 받는 동시에 인수대비가 되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는 성종이 태어난 지 1달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20대 중반에 청상과부가 된 한씨는 자식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하게 길렀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그녀를 폭빈(暴嬪)이라 부를 정도로 자식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세조가 간혹 손자들을 궁궐로 불러 ‘글공부만 하지 말고 놀기도 하라’고 권할 정도로 그녀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뜨거웠다. 한 때 세손을 꿈꾸던 자신의 아들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홀로된 20대 중반의 터져 나오는 젊음을 스스로 제어하기 위해 그녀는 점점 차갑고 엄격한 사람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인수대비의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한 성품은 그녀가 일궈간 삶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핵심적 키워드이다. 인수대비는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무척 엄격한 성품이었다. 이 같은 성품은 성종이라는 훌륭한 군주를 배출해내는 옥토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길러내는 함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만만찮은 성품을 지닌 그녀가 불제자였다는 점은 조선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의경세자의 원당인 정인사를 비롯해 전국 수많은 사찰의 화주가 되었던 것은 물론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인사 판당 중수비용을 뒤에서 지원한 인물도 그녀였다.

인수대비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똑똑했던 왕비로 꼽힌다. 그녀는 훈민정음뿐만 아니라 유교의 사서경전과 한역경전을 줄줄 꿸 정도로 한문에도 능통했고, 불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할 정도로 뛰어난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인수대비는 남편과 아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간경도감을 통해 불경간행에 적극 나섰으며, 1471년 간경도감이 폐쇄되자 흩어진 목판들을 수집해 불경을 인쇄했다. 이렇게 해서 발간된 불경이 총 29편 2805권에 달했다.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도첩제의 폐지를 막아냈던 이 또한 인수대비였다. 성종은 유교적 정치체제를 완성한 군주로 역사에 남기를 원했다. 세조때 잠시 흔들린 유교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경국대전』을 완성시키는 한편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해 사림정치의 활로를 터놓았다.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는 불교를 비롯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이들은 국법으로 승려가 되는 법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불교의 씨를 말리려는 조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도첩제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도첩제 폐지의 부당함으로 낱낱이 반박하는 언문 교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 한번 보내 수용이 되지 않자 무려 세 번에 걸쳐 교지를 보냈다.

내용인 즉, 불교는 선왕의 유제(遺制)이고,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한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이고, 중국은 집마다 불당이 있어 불교를 숭상하는데도 오히려 오랑캐를 잘 막고 있으며, 승려가 산중에 살기 때문에 도적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요구를 묵살하자니 유교의 최고 덕목인 효를 저버리게 되고, 그렇다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첩제를 다시 인정하자니 유교적 성군의 이미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인수대비의 반대로 인해 도첩제 폐지 문제는 흐지부지 되었고, 조정에서도 승려의 출가를 막는 다른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도첩제는 유야무야한 제도가 돼버렸다.

인수대비는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자였지만 유교적 기틀로 왕실을 바로 잡기를 원했다. 유교적 여성관을 담은 좬내훈(內訓)좭을 펴내 왕실여인들의 규범으로 삼았다. 내훈에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포함한 ‘조선 왕실여인으로서의 의무’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녀가 요구한 의무는 한 명의 여인이기를 포기하고, 유교사회를 지탱하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바람직한 태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인물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는 스스로에게는 물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그러했고, 며느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왕비 윤씨의 투기가 심해 아들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인수대비는 며느리를 궐 밖으로 내쳤고, 결국에는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 같은 그녀의 엄격함은 결국 손자 연산군에게 커다란 업보를 물려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후일 생모가 할머니의 분노와 후궁들의 모략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연산군은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돌변했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후궁들을 죽이고 인수대비까지도 이로 인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인수대비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죽은 시점이 정소용 등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연산군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부 사서에서는 연산군이 머리로 들이받아 인수대비를 쓰러뜨렸다고도 하고, 일부에서는 연산군이 정소용 등 성종의 후궁들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여성으로 꼽히는 인수대비는 그 지혜로움으로 인해 조선왕조의 틀을 완성한 훌륭한 임금을 길러냈고, 꺼져가던 조선의 불교를 지켜내는 버팀목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선왕조 최고의 폭군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무서운 인과의 법칙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었을 유학서나 불경들을 통해서도 측은지심이나 자비심을 충분히 기르지 못했던 것 같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피를 토하며 원망의 씨앗을 남겼고, 어머니의 피 묻은 금삼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한 연산군은 할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세상을 향해 거칠게 토해냈다. 그 결과 조선의 민중들은 끝없는 수탈과 혼란으로 고통 받아야 했고 인수대비의 공로는 모조리 역사서에서 지워진 채 무덤에 애첩(哀牒) 하나 없는 채로 쓸쓸히 묻히고 만, 인생의 말로가 매우 참혹한 왕비가 되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가정(if)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수대비가 폐비 윤비를 내치지 않았더라면 하는 따위의 설정은 성립될 수도 없다. 다만 인수대비는 스스로 선택한 강단 있고 무자비한 성품으로 평생 절개와 원칙을 지키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그런 성품이 며느리와 손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돌아갔을 뿐이다.

순종적인 며느리, 엄격한 어머니, 비정한 할머니의 역할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못내 아쉬운 것은 그녀가 인간을 키우고 살찌우는 가장 좋은 다리는 용서와 자비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은, 부처님께 귀의했으나 그 부처님이 복덕과 지혜를 두루 갖춘 양족존(兩足尊)임을 체득하지 못했던 삶이 보여준 한계를 뚜렷한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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