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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5. 연기②-정현종의 ‘섬’

기자명 법보신문

인간 인연 ‘섬’에 비유 고해 건너는 의지처 의미

<사진설명>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지중한 인연은 험난한 삶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의지처가 되어 준다.

연기론은 시간에 관련된 인과관계에서 공간, 대상과 대상 사이의 인과론으로 영역을 넓힌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 조건이 된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은 저것의 조건이 되고 저것 또한 이것의 조건이 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이 없으며 원인이 없는 결과 또한 없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아주 짧은 시, ‘섬’ 전문이다. 짧지만 음미할수록 이 시의 진폭은 넓고 깊다.

얼핏 보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 앞의 책과 창밖으로 관악산 능선 너머로 반짝이는 별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하지만 그 별과 책 사이엔 나와 능선과 무수한 별들의 섬이 있다. 그 별이 지금도 별과 별 사이에 중력을 미치고 있고 그 중력은 별과 별을 다리로 하여 태양과 지구 사이에도 영향을 준다. 그 영향으로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을 하며, 그 때문에 대기가 순환하고 바람이 일고 구름이 흐른다. 구름이 흘러 비를 내리면 나무가 자라며 그 나무 중 하나를 잘라 펄프로 만들고 그 펄프로 만든 종이에 우주의 운행과 대자연의 섭리에 영감을 받은 이가 글을 써서 책을 만들고, 그 책 중 하나가 지금 내 책상에 놓인 것이다. 지금도 수 억 광년 멀리 떨어진 별 하나가 폭발한다면 그것은 지구의 대기에, 생명체에, 나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날숨은 우주의 기를 받아들여 살을 만들고, 들숨은 우주와 소통한다. 이렇듯 새싹이 하나 돋고 낙엽이 한 잎 떨어지는 데도 온 우주가 관여한다.

1991년 미국은 애리조나주 오라클에 유리로 밀폐시킨 가상지구 바이오스피어2(Biosphere Ⅱ)를 14만 평방피트에 달하는 너른 땅에 지었다. 흙과 물, 공기, 들과 언덕을 갖추고 동, 식물 또한 살게 하였다. 빛만 빼놓고는, 산소도 바람도, 꽃가루받이도 모두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8명의 과학자 부부들이 이 작은 지구에 들어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18개월만에 바이오스피어2는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 구성엔 단역 없어

산소 농도가 처음 21%에서 14%로 떨어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대신 가상지구에 충만하게 된 이산화탄소와 질소로 인해 잡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랐다.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몇몇 곤충들만 번창하게 되었고, 25종의 작은 동물들 가운데 19종이 전멸하고 말았다.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대신해 주던 곤충들이 죽자 식물들도 번식할 수 없게 되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모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우선 건물의 콘크리트 벽이 산소를 흡수하고는 방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농사용 토양에 함유된 박테리아가 산소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생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하찮은 박테리아가 대기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균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인드라망처럼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있는데 인간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다. 지구상의 온 생명 가운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들 생명체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온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광주비엔날레 2000의 주제대로 ‘人+間’이 인간이다. 타인이 있기에 내가 있으며,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바로 옆에 사람과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더불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누구도 욕망과 꿈에 이를 수 없기에 고통의 바다, 한 줌의 돈과 한 그릇의 밥, 한 자락의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하여 늘 긴장해 있고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며 언제나 살기에 차서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질주를 하는 이기와 욕심의 바다, 이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도 그 바다에는 섬이 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정박하여 잠시나마 누려보는 아름다운 숲과 과일이 있다. 이 바다 저 바다를 헤엄치다 지치고 지쳐선 올라와 가만히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면 한 아름 가득 들어오는 맑은 태양빛이 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그만 모든 것을 중지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알살 뭍으로 끌어올려 썩은 생채기를 보듬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자체가 부조리하고 삶 자체가 고통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다 한 가운데에 섬이 있기 때문이다. 섬에 어린 추억과 아름다운 경험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백억 년 가운데 찰나의 순간이라 할 한 평생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와 나와 그들의 업(業),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보살핌이 원인이 되어 나는 태어나고 길러졌다. 타인이 없었다면 나는 없다. 가까이로는 내 책상 앞의 책, 멀리로는 관악산의 능선에서 그 위로 밝게 반짝이는 별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오늘 나라는 존재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데 관여한다.

서양 속담에 “여섯 다리를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다.”라 한다. 실은 네 다리만 건너면 우리는 모두 이웃이다. 내가 미국 영화배우로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리처드 기어와 식사를 하며 불교 이야기를 하려면 몇 다리를 건너야 할까? 아니,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 내 후배 가운데 영화감독이 있으니 그에게 전화를 하여 리처드 기어와 친한 미국 감독을 잘 아는 한국 감독을 소개받으면 된다. 세 다리만 건너면 나는 리처드 기어와 식사를 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

네 다리 건너면 모두 이웃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00여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00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00명에 각자 300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700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 명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에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이웃인 셈이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할까?

타인이 없었다면 나는 없다. 자끄 라깡의 분석대로 주체는 타자를 통하여, 타자를 자아화하여 자신을 형성한다. 젖을 먹는 아기는 처음엔 자신이 어머니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18개월이 지날 무렵 아기는 대상인 거울 속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어머니처럼 팔다리와 얼굴과 성기를 가진 개별적인 주체임을 깨닫는다. 다음엔 아버지의 이름(the-name-of-the-father)을 통하여, 타자들이 뱉어내는 수많은 언어와 상징들, 그리고 그에 담긴 윤리와 도덕,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타자들과 부딪히고 맞서고 연대하면서 자아를 형성한다. 그러니 나라는 주체도 실은 대상을 통하여, 타자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라깡이 이런 깨달음에 이르러 데리다나 푸코, 들뢰즈 등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평을 연 것도 실은 불교의 연기론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타인과 관계를 통하여, 타인 속에서, 그 사이에서 나를 형성하고 나로 존재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이 조건이 되고 다리가 되어 너와 내가 존재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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