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통청 ⑦
삼보통청 ⑦
  • 법보신문
  • 승인 2007.09.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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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인은 삼보에 대한 이해부터 갖춰야
삼보와 나의 관계 알고 믿을 때 삶 뚜렷

한마음으로 귀의하며 청하옵니다. 대자비로 근본을 삼아 일체 중생을 구호 하고자 재산과 양식이 되시고 병이 들어 앓는 이에게는 어진 의사 되시며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치고 어두운 밤중에는 밝은 횃불 되시며 빈곤한 이에게는 보배창고 되시어 모든 중생 골고루 풍요와 이익을 주시 옵니다.

이 부분은 청사(請辭)로써 청하는 삼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밝히는 문장이다.

부처님을 비롯한 삼보는 자비를 몸으로 삼는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과 해탈이지만 보다 큰 목적은 자비의 구현에 있다. 보통은 자비를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표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깊다.  자비라는 말에서 자(慈)는 기쁨으로 일으키는 사랑이고 비(悲)는 불쌍해서 일으키는 사랑이다. 가엾은 중생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들을 이익하게 하려는 기쁨이 하나로 된 것이 자비인 것이다. 또한 자비에도 세 종류가 있어 중생들을 이락하게 하는데 중생연(衆生緣) 자비, 법연(法緣) 자비, 무연(無緣) 자비가 그것이다. 부처님과 삼보는 바로 이와같은 삼종의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초기 불교에 있어 부처님과 삼보는 인격적 존재로 끝이 난다. 부처님의 경우만 보아도 초기 불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을 하나의 신들도 비교 할 수 없는 완전한 인격체로만 본다. 하지만 대승의 입장에서는 참된 부처님과 삼보는 몸이나 인격이 아니고 역사의 테두리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이 끝이 없다면 부처와 삼보도 끝이 있을 수 없고 중생이 존재하는 곳이면 부처와 삼보 역시 똑같이 존재하며 중생이 존재하므로 삼보의 자비도 끝이 없다.

왜냐하면 법계의 성품과 삼보와 중생의 마음이 결코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보는 홀로 청정하여 중생의 마음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중생의 마음과 연결 되어 있어 중생의 선악업의 마음을 다 알고 보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다만 중생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은 어떤 자인가? 번뇌의 병으로 괴로움을 받고 정법을 모르고 윤회의 길에 헤매며 무명과 욕망의 어둠에 휩싸인 채 궁핍한 거지처럼 대상을 따라 무언가를 항상 구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에게는 의지처가 있어야한다. 혹 중생들이 괴로움을 벗기 위해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 무엇에 의지 한다 할지라도 그 것들은 끝내 의지처가 되어 주지 못한다. 순간뿐으로 언젠가는 버리고 떠나가고 말 것들이다. 다만 오직 의지처가 있다면 부처님과 삼보이다. 부처님과 삼보는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의지 처로 중생들의 중생이 삼보에게 귀의 할 때 중생의 방황은 멈추어지고 밝아지고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

부처님의 세계에 들려면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삼보의 땅속으로 들어 가야한다. 그러면 삼보는 마치 대지가 씨앗을 품어 과일이 열리게 하듯 갖가지의 힘과 방편으로 공덕의 과일을 맺게 할 것이다. 삼보를 향한 믿음의 씨앗을 기르지 않으면 수행을 하여 진리를 깨우쳤다 할지라도 그것은 올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오직 불교만이 가장 높고 완전한 깨달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갖추어야 할 바는 삼보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다. 이 세상과 삼보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믿음을 갖추게 되면 삶의 방향은 한층 뚜렷해진다.

이 단원은 삼보 앞에서 자신이 깊이 병든 자임을 인정하고 길 잃은 자임을 인정하고 어둠에 휩싸인 자임을 인정하고 궁핍한 자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오직 삼보만이 이러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삼보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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