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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정토 극락세계는 멀리 따로 있지 않다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이 법을 펼쳤던 조계 남화선사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웅보전 앞에는 향객들이 마음을 모아 사른향내음과 연기가 늘 함께 하고 있다.

21. 서방(西方)
 
마음에 다만 깨끗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서방에 가는 것이 멀지 아니함이요, 마음에 깨끗하지 아니한 마음을 일으키면 염불해서 정토에 가 나려 하더라도 이루기가 어렵나니라.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것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아닙니다.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켜 염불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나려고 해도 그건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 정견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견이 안선 사람은 염불을 천년만년해도 꿈에서라도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견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했는데 왜 깨끗이 해야하느냐 하면, 우리의 본래 존재원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이 보고 있는데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 깨끗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나 부처님이나 형상은 똑같이 보는데, 우리가 부처님께서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본질입니다. 본질만 보면 마음을 깨끗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우리의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있고, 연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서 염불을 하면 서방정토에 가서 나는데,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무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날려고 염불을 해도 거기에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뿐만 아니라 참선도 정견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 견성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을 내가 있다는데 집착하고, 유아(有我)로서 행동하면서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잘 안 들리게 되고, 설사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도 치구심(馳求心)을 쉬지 아니하면 견성이 안됩니다. 그래서 정견을 갖춰서 공부를 해야 서방정토에도 가서 날 수가 있고 견성도 할 수 있습니다.

십악(十惡)을 제하면 곧 십만을 행함이요.

세속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양설 하는 것, 즉 이쪽에 가서 이말 하고 저쪽에 가서 저말 하면서 서로 싸움을 붙이는 행위를 비롯해 사탕발림으로 좋게 꾸며서 하는 말, 성내는 것, 사견을 내는 것 등과 우리가 받은 오계를 합해서 십악(十惡)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십악을 제하면 십만을 행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나’라는 것이 없는 줄 알면 한 개 한 개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이 연기현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알면 십악의 열 가지가 한꺼번에 다 없어집니다. 십악은 따지고 보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데서 생기는 병폐입니다.

육조단경에서 돈법(몰록)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참선은 하나 고치고 또 하나 고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몰록 한꺼번에 다 고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게 없다는 것만 이해하면 전부다 고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참선은 다른 수행방법 보다 수승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악을 제하면 십만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평수가 십 만리 정도 넓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 가지 삿된 것이 없으면 팔 천을 지나간다.

십악을 제하면 곧 십만을 행한다는 것과 여기서의 팔 천을 합해서 십만 팔 천리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음의 크기를 십만 팔 천리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것은 공간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공과 같은 수치입니다.

다만 직심을 행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이르는 것이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다.

직심이 양변을 여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군아 다만 십선을 행하면 어찌 모름지기 다시 가서 나기를 원하겠는가.

십선을 행한 그 자리가 서방정토 극락세계이고 그 자리가 아미타불인데 다시 어디에 가서 날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십악지심을 끊지 못하면 무슨 부처님이 곧 와가지고 영접해 청하리오.

십악의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어떠한 부처님이 따로 있어서 나를 따로 영접하고 맞이하고 청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십악을 없애야 그 십악을 없앤 자리가 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이고 아미타불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남이 없는 돈법을 깨달으면 서방을 보는 것이 자못 찰라 간에 있음이요, 돈교에 대승을 깨닫지 못하면 염불을 하더라도 가서 나는 길이 머니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육조 스님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다른 곳에 따로 있는 세계로 보지 않았고 아미타불도 다른 부처님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이고 우리 마음이 아미타불 부처님이라고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근기가 약한 분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있으니까 부지런히 염불을 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분이 염불을 부지런히 해서 정말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날 수 있을 정도의 수행이 되면 “아! 아미타불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있었구나,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따로 있지 않고 여기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조 스님이 말하되, 혜능이 위사군을 위해서 서방을 찰라간에 옮겨와서 목전에 문득 보게 하리니 위사군은 보기를 원하는가.

육조 스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이 자리에 옮겨 놓겠다고 하면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다 보기를 원하겠지요.

위사군이 예배하되, 만약 여기에서 얻어 본다면 어찌 모름지기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화상께서 자비로써 서방을 나투면 크게 좋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나툰다면 정말로 크게 좋겠다는 말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려고 수고를 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육조 스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육조 대사가 말하되, 문득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고 의심이 없을 것이니 곧 대중은 흩어져라.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목전에다 옮겨 놓고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보여주십시오” 하니까 “문득 정토 극락세계를 봐라”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위사군이나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우담바라도 피고 굉장한 세계가 앞에 전개되리라고 기대를 했겠지요.

그런데 육조 스님은 문득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겠지요. 그런데 그대로 보이는 것과 보는 내가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알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도 “문득 서방정토를 봐라. 보고 의심이 없을 것이니 곧 대중은 흩어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사 스님들이 더러 주장자나 불자를 들고 이거 알겠느냐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근기에게 하는 법문입니다.

대중이 놀라서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육조 스님이 문득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보고 알겠거든 흩어지라고 하니까 깜짝 놀래서는 무슨 일인지 대중들이 알지 못했지요. 알지 못한 사람한테는 또 밑에 설명을 따로 하시는데, 여기서는 상근기는 알아버렸으면 더 이상 법문을 들을 필요가 없으니 흩어져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설명을 더 들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육조 스님이 상근기 법문을 하고 나서 하근기 사람들을 위한 법문을 합니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대중은 정신을 차려 들어라. 세상 사람의 스스로의 색신(色身)은 성(城)과 같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은 성문(城門)과 같다.

눈·귀·코·입·몸을 통해 밖에 있는 것을 감지하고 이해하고 성내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성문 밖에 나가면 좋은 일도 보고 나쁜 일도 보고 그러는 것과 똑 같지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은 성문과 같고 몸은 성과 같다고 합니다.

밖으로는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는 마음속에 뜻의 문이 있다. 마음은 성 안의 땅과 같고 성품은 왕과 같다.

성문 안에 있는 임금이 기분이 좋을 때는 웃고 나쁘면 화를 내고 그러는데, 임금이 화를 낼 때면 백성들까지 벌벌 떨고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증오심이 생겨서 화를 내면 온 몸이 벌벌 떨고 괴로운 상태가 되기도 하니까, 이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성품이 있으면 왕도 있고 성품이 가면 왕도 없다.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도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도 무너진다.

이 말은 조금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개공이라고 했습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에서 색은 우리 몸이고, 수상행식은 우리 정신과 같습니다. 그리고 몸이나 마음이나 다 공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성품이 있으면 몸도 있고 성품이 가면 몸도 마음도 다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반야심경의 뜻과 맞지 않는 말이 되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생명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어쨌든 몸도 그렇고 정신도 공이라고 했습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몸과 정신이 결합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은 생명과 몸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정신에도 공이 있고 이 몸에도 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성품이 가게되면 몸도 무너진다. 그러니까 성품은 정신과 비슷하게 설명을 해 놓은 것입니다. 앞에서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육조 스님 당시에는 인쇄물로 출판을 한 것이 아니고 손으로 써서 전해졌기 때문에 필사하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됐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조단경 전체의 내용으로 보면 중도연기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말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성품은 정신에도 있고 육체에도 있습니다. 절대 분리되는 것이 아니므로 성품과 현상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더라도 육체 속에서 형상과 성품이 있고, 정신 쪽에도 형상과 성품이 있습니다.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성품을 생명으로 설명한 것 같이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작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조금 잘못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은 분들은 이 부분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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