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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종비 폐비 윤씨

기자명 법보신문

치명적인 사랑으로 조선을 불태우다

치명적 사랑. 사랑을 일컫는 말 중에 이 말보다 더 강렬한 표현이 또 있을까.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이 말은, 사랑이 갖고 있는 여러 특성 중에서도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 즉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역사 속에는 자신도 주체 못하는 지독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파멸에 빠뜨린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 드라마 ‘왕과 나’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종비 폐비 윤씨는 치명적인 사랑으로 인해 연인을 잃고, 목숨도 잃고, 나아가 자식의 운명까지 망가뜨린 대표적인 여인이다.

윤씨는 본래 왕비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다. 궁녀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가 오직 사랑의 힘으로 왕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병으로 죽자, 왕실에서는 성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후궁 숙의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자을산군(후일 성종)의 연인이었던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드라마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 조선시대 사료 중 어디에서도 그녀가 궁중에 들어가기 전부터 성종을 알았다는 기록은 없다. 어쨌든 궁중에 들어간 그녀는 성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성종의 첫 번째 아이를 임신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 또한 그녀를 ‘현숙하다’며 흡족하게 여긴 터라 그녀는 후궁의 신분으로 왕비의 지위에 올랐다. 왕비가 된 지 3개월 후에는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연산군이다.

그런데, 이들 부부 사이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성종이 여자를 아주 좋아하는 남자였고, 윤씨는 남편에 대한 독점욕이 아주 강한 여자였다는 점이다. 학문에도 출중했지만 술과 시, 사냥을 좋아하는 혈기왕성한 20대의 성종은 윤씨 이외에도 여러 후궁의 처소를 드나들었다.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인 윤씨보다 더 젊은 여인들에게서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남편의 사랑으로 왕비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윤씨는 아들을 낳은 후 왕의 발길이 뜸해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같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았고, 그것이 자신의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사술을 이용해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기 위한 비방들을 몰래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궁들의 처소로 가는 길목에 죽은 사람의 뼈를 묻어두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하면 후궁들이 그것을 밟고 다니다 죽는다는 민간의 비방이었다. 그 방법이 효험이 없자 윤씨는 ‘소용 정씨와 엄씨가 왕비와 원자를 해치려 한다’는 투서를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 숙의 권씨의 집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중전 윤씨의 방에서 똑같은 종이가 발견되고, 게다가 거기에 비상이 담겨 있는 것이 발각됨에 따라 중전의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윤씨는 폐비 대상으로 거론되었지만 원자의 어머니를 내쳐서는 안 된다는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처벌만은 면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성종이 후궁의 처소에 있는데 중전이 그곳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자신의 생일인데도 아무런 인사조차 없는 남편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다.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는 그날 윤씨의 처소에 들른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고 다음날 아침 이를 본 인수대비의 분노가 폭발해 윤씨가 폐서인이 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실록에서는 성종이 직접 나서서 왕비의 부덕한 행실을 꼬집으며 폐비를 주장하고 있다.

“윤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나 요동이나 강계에 보내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南方記)에 발원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 앞에서 불로써 팔로 태워 맹세하는 의식(연비)을 하여 굳게 다짐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믿었더니, 지난날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이 사건으로 성종과 윤씨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중전 윤씨는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폐비당한 지 열흘 뒤에 윤씨의 젖먹이 아들이 죽었다.

이후 성종이 보여주는 행보는 한때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의 순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폐비 윤씨가 궁에서 쫓겨난 후 다섯 달 뒤에 사가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의 대신들이 “이웃 사람을 추문하고 담을 쌓게 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성종의 반응은 냉소를 넘어 잔인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도적을 방비하지 않고서 도둑을 맞았는데, 어찌 이웃 사람을 추문하겠는가. 지금 도둑맞은 일로 윤씨 집의 담을 쌓도록 한다면 서울 안의 도둑맞은 집들도 담을 쌓도록 하겠는가.”

폐비 윤씨의 존재는 차츰 성종뿐 아니라 대비들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연산군이 성장해 어미의 존재를 알 경우,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폐비 윤씨의 보복이 두렵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윤씨가 폐비된 지 3년 뒤 결국 성종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동의를 얻어 사약을 내렸다. 『기묘록』에는 폐비윤씨가 사사된 결정적인 이유를, 인수대비가 내시 안중경을 시켜 폐비를 살펴본 후 왕에게 거짓으로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매일 같이 머리 곱게 빗고 화장하여 조금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내수사에서 보낸 음식도 독약이 든 것이라 하며 먹지 않고 후일 원자가 자라면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실록에는 왕비의 죄목만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인수대비가 언문으로 내린 폐비의 사사 이유 8가지 중 하나는 “(윤씨가) 종에게 죄가 있으면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 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 너를 족멸시킬 것’이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 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부왕이 위에 있으면서 모름지기 이와 같은 사람을 단절시켜야만 원자를 보양할 수 있을 것이다”였다. 결국 폐비윤씨는 1482년 8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이듬해인 1483년 2월 연산군이 세자에 책봉됐다. 그 어미의 희생으로 아들이 보위를 보장받은 셈이다.

그러나 폐비 윤씨의 이른바 ‘치명적 사랑’은 끝내 조선왕조를 불태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묘록』은 폐비 윤씨의 죽음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폐비 윤씨가 피가 뚝뚝 묻은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건네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수건은 훗날 연산군을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 길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소용과 엄소용을 찾아가 밧줄로 묶어 패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마저 머리로 치받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조선의 민중들은 ‘정신을 놓아버린’ 폭군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치세를 맛보아야 했다. 어린 시절 세종을 능가하는 성군이 될 것으로 촉망받던 연산군은 어머니가 남긴 원망의 씨앗과, 아버지의 배신, 할머니의 무정함이 남긴 분노의 굴레에 갇혀 조선왕조 사상 최악의 군주로 남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고, 그녀의 묘를 현재의 회기동으로 이전해 회릉으로 승격시켰다. 또 인근에 연화사를 중창해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원각사를 기생들의 연회장소로 만들기까지 했던 연산군이 불심으로 연화사를 중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살아생전 불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아들의 공양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그녀는 다시 폐비 윤씨로 돌아갔고,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질투에 미친 여자’, ‘아들을 망친 사악한 어머니’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종이 조선의 태평시대를 가져온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을수록, 그녀는 버림받아 마땅한 여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금삼의 피를 남겼는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단언할 수 없다. 또 한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바라본다면 반드시 경멸돼야 할 대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왠지 가혹한 감이 없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 것이 한 남자였지 일국의 왕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분노를 토해낸 일상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그토록 큰 죄가 된 것은 그가 사랑했던 남자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의 순정이 순정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던 불쌍한 여인에게 칠거지악이나 어머니의 도리를 이제와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랴. 어리석은 욕망의 굴레 갇혀 불법과 사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사랑에만 몰두했던 한 인간의 비참한 말로는 참으로 측은하기 짝이 없다는 한숨만 나올 뿐.

사랑과 원망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원망은 자신을 태우고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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