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별 없고 정의로운 사회가 부처님 세상

기자명 법보신문

경실련 위 정 희 시민입법국장

<사진설명>힘겹거나 포기하고 싶을 땐 ‘은지(銀地)’라는 법명을 생각한다는 위정희 보살은 “이 세상이 부처님 나라에 조금 더 닮아가도록 사회의 천수천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박한 시골 소녀가 있었다. 읽을만한 책도, 즐거운 볼거리도 부족했던 1970년대, 이 시골 소녀의 유일한 재밋거리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뿐이었다.

“옛날, 옛날 부처님 살던 시절 어느 나라 왕의 딸에 관한 얘기란다. 지체 높은 공주님은 부처님께 이런 맹세를 하면서 살아갔다는구나. 자신을 위해 재물을 모으지 않고 고통스러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시라도 잊지 않겠다고.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지….”

엄마는 절에 불공을 드리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어느 시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공주님 얘기를 해주곤 했다. 공주님의 이야기는 끝도 없었다.

“공주님은 부처님께 이런 발원을 했대요. 어른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으며 평생 베풀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살아가겠다고.”

이야기의 결론은 늘 육바라밀을 실천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 가득한 마루에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 얘기를 듣노라면 어느새 눈은 스르르 감겨왔다. 재미있는 것은 소녀도, 소녀의 어머니도 그 이야기가 『승만경』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역시 스님에게서 들은 법문이 무언지 몰랐으나 그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답기에 딸에게 옛날 얘기처럼 들려준 것이다. 시나브로 소녀의 마음에는 엄마의 지극한 모성애와 불심이 그대로 전이됐다.

시골 소녀는 이제 대한민국 NGO 운동을 견인하는 여성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위정희(41·은지) 보살, 그녀는 현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에서 시민입법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정부와 공기업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국가정책이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감시와 비판이 주된 일이다보니 그녀에 대한 선입견은 냉철함과 강인함으로 대변된다. 지난 20여 년간 시민운동을 전개하며 수없이 많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니 이를 선입견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는 일.

어머니 영향으로 불심 접해

그렇지만 그녀는 분명 심지 단단한 불자다. 시골 조그만 읍의 작은 고등학교, 그곳에서 그녀는 부처님 닮은 삶을 살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교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소녀는 매주 일요일 동무들과 인근 사찰에서 법회를 봉행하고, 스님에게 더 많은 부처님 얘기를 들었다. ‘은지’라는 법명을 받은 것도 이때다. 솔직히 처음엔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친구들은 ‘연화심’, ‘혜명화’ 등 예쁘고 불심 깊은 법명을 주면서 자신에게는 예명 같은 법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법명은 길이가 길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사 스님은 너털웃음과 함께 ‘은지’에 담긴 뜻을 일러 주었다. ‘부처님의 땅을 일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꼭 소녀에게 주고 싶은 법명이란다. 각자의 내면에 불성이 있음을 깨닫고 열심히 정진하며 항상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대학시절 소외계층에 주목

소녀는 이제 대학생이 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유아복지학과에 진학했다. 엄마의 포근한 무릎은 소녀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아 장래 희망까지도 바꾸었던 것. 입학 첫날, 무작정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향내음이 너무좋아 발길을 옮기다보니 자연스레 도착한 곳이 불교학생회였다. 고등학교 시절 가슴에 새긴 스님의 당부가 자신을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소녀는 학교 생활이나 동아리 활동이나 매사 모두가 인정할 만큼 열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1987년은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과 학생들의 함성이 전국에 가득할 때다. 박종철 사건과 6월 민주항쟁, 이한열 사건 등을 지켜보며 소녀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사회의 어두운 곳, 소외받은 이들에게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빈민촌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생존을 위해 일터로 향하는 어른들, 아이들은 텅 빈 공간에서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엄마가 되어 무릎을 내 주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속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공주님이 바랐던 세상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졸업은 그녀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생업과 이념사이에서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빈민촌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이야기 속 공주님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소녀는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시민사회 운동으로 눈을 돌렸다. 경실련 간사로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은 이유였다.

불국토 발원…시민운동 동참

NGO 간사로서의 분주한 일상은 부처님의 딸로 살아가겠다던 서원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연의 씨앗은 무량겁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법. 오래지 않아 그녀는 부처님 품을 다시 찾게 된다. 1995년, 경실련은 그녀를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에 파견했다. 사실 경실련이 추구하는 목표가 불교의 불국정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이웃 종교인인 까닭에 말 못할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사무실 한쪽 벽에 부처님 사진이 걸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든든하고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평온할 것만 같았던 그의 마음이 한 순간 깨져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IMF 사태에 따른 책임 추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다. 우연히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던 그녀는 더 이상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충격이었다. 족히 1000여 명이 넘는 노숙인들이 추위를 피해 좁은 지하통로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노숙인이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접하기는 했어도 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욱이 이들 사이에는 어린이와 여성들도 함께 뒤엉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노숙인들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된 노숙인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로 인한 괴로움은 이내 눈물로 바뀌었다. 모른 척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 새벽 곧장 조계사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부처님은 온화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경불련 차원의 지원을 주장했다. 예상과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반대였다. 이유가 명확했다. 경실련의 사회개혁 운동에 동참해야 하는 경불련이 활동 방향을 갑자기 사회참여 운동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체의 설립 취지에도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불법(佛法)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경불련이기에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 집행부와 맞섰다. 사회개혁도 참여활동도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불국정토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경불련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종교인들과 시민단체를 만나 동참을 유도하고 ‘실직노숙자대책종교·시민단체’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다. 또 서울역 인근 서소문공원과 서울 보문동에 노숙인 긴급구호센터인 ‘아침을 여는 집’이 설립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실직 노숙자들의 범사회적 일자리 찾아주기 캠페인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2001년 경실련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노숙인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과 정책을 정부에 제안했다.

IMF땐 노숙인 대책 마련 주도

그녀는 따뜻하다. 이 세상을 도화지 삼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공주님의 꿈을 그려가고 있는 중이다. 30여 년 전 순박한 시골 소녀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엄마가 그랬듯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들에게 옛날 얘기를 들러준다. 공주님이 원했던 그리고 그가 바라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제 길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 스님이 일러주신 것 같아요. 힘겹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법명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곤 합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가피를 받은 거겠죠. 많은 분들과 함께 사회의 천수천안이 돼 부처님 나라에 조금 더 닮아가도록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