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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5

기자명 법보신문

제 11장 태백산 도솔암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나무끼리 비벼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궈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아 끝내 불씨를 얻지 못한다.”

일타는 수행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원칙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마을로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암자에서 사방 40리 밖에 있었으므로 동구불출을 지키려면 탁발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10리 터울로 화전민 농가가 한 채 한 채 있긴 했지만 그 집들은 오히려 일타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어렵게 사는 곤궁한 화전민들이었다.

일타가 갈 수 있는 데는 홍제사까지 뿐이었다. 도솔암은 홍제사의 산내암자일뿐더러 양식이 떨어지면 홍제사로 가서 걸망에 넣어오거나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홍제사 살림이 큰절처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퇴락한 홍제사도 암자처럼 작은 절이었다. 법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법당과 작은 대중방과 창고가 한데 딸린 인법당이었다.

불교정화를 하러 서울로 갔던 비구니스님들이 홍제사로 돌아온 것은 일타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탁발을 나가지 않는 일타에게 양식 걱정을 덜어주었다. 특히 인홍은 일타의 속가 어머니인 성호를 잘 알고 있었다. 인홍은 성호가 자신보다 나이 많고 한문을 깨쳤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홍은 일타의 연비를 보고 감동하여 일타가 수행하는 데 자신이 외호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장좌불와에 들어간 일타는 졸음이 오면 자신의 무릎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래도 졸음을 견디기가 힘들어지면 암자 마당으로 나와 한산시를 크게 외웠다.

밥을 말해도 끝내 배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면하지 못하네
배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추위를 면하려면 옷을 입어야 하네
깊이 생각해 헤아릴 줄 모르고
다만 부처 구하기 어렵다 말할 뿐
마음 한 번 돌리면 곧 부처니라
아예 멀리 밖에서 구하지 말라.
說食終不飽 說衣不免寒
飽喫須是飯 著衣方免寒
不解審思量 祇道求佛難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

경전을 공부하기보다 참선하여 깨쳐야 마음의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한산시를 외다보면 수마가 물러갔다. 그래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꾸벅꾸벅 꺾이고 침이 무릎에 떨어지면 홍제사로 내려갔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는 길이라지만 산길이 끊어진 곳에서는 계곡물 속의 바위를 타고 가야 하므로 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미끄러운 바위에서 넘어지면 바로 계곡물 속으로 처박히었다. 발가락이 부러지고 정강이가 으깨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통증보다 수마가 더 맹렬하게 일타를 괴롭혔다. 한밤중에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다녔으므로 일타 모습은 귀신의 모습이었다.

한밤중에 홍제사 마당에서 만난 비구니스님들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일타는 따뜻한 목소리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인홍의 권유도 뿌리치고 다시 도솔암으로 올랐다.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졸음이 물러가면 도솔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동구불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차츰 수마가 물러갔다. 한밤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도 정신이 가을 연못물처럼 맑았다. 그럴 때마다 일타는 스스로 고요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한산시를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내 전생에 너무 어리석었기에
오늘 이렇게 깨치지 못했다
또 오늘 이렇게 구차한 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 또 닦지 않으면
내생에 또한 본래와 같으리
양쪽 언덕에 모두 배가 없으면
아득한 저 바다 어이 건너리.
生前太愚癡 不爲今日悟
今日如許貧 總是前生作
今日又不修 來生還如故
兩岸各無船 渺渺難濟度

깨치지 못한 오늘의 모습을 참회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오늘 부지런히 정진하겠다는 맹세의 시이기도 한 한산시를 외우게 되면 흥이 났다. 마음에 감흥이 일면 서울을 떠날 때 걸망 속에 챙겨온 『유교경(遺敎經)』도 꺼내 외웠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그것은 마치 나무끼리 비비어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구어지기도 전에 그만 두는 것과 같다. 그는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 해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려면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잊지 않고 생각하면 온갖 번뇌의 도둑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을 모아 마음에 두라. 바른 생각을 잃게 되면 모든 공덕을 잃지만, 생각하는 힘이 굳세면 비록 오욕의 소굴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완전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마음은 선정에 들 것이다. 마음이 선정에 들면 세상의 생멸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선정을 부지런히 익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물을 아끼는 집에서는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듯이, 우리들도 지혜의 물을 채우려면 선정을 잘 익혀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요하고 무위(無爲) 안락을 얻고자 한다면 안팎의 시끄러움을 떠나 홀로 한가로운 곳에 머물라. 마음속의 온갖 분별 망상과 바깥의 여러 대상과 환경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제석천도 공경할 것이다.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약한 나무에 많은 새떼가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염려가 있는 것과 같다. 또 세상일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가리켜 멀리 떠남(遠離)이라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근심 걱정도 적다. 또 욕심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각박하지 않다. 그래서 마침내는 고뇌가 말끔히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들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이처럼 한없이 맑은 정신으로 시와 경전을 외우며 밤을 새우는 어떤 날에는 바깥의 동정이 감지됐다. 누군가가 왔다가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산짐승이 불빛을 찾아 방문 앞에까지 왔다가 가는가 싶어 문을 열고 보면 아무 흔적도 없었다. 산 위에 둥그런 달이 떠 있거나 낙엽이 마당에서 뒹굴고 있거나 백설이 난분분 난분분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가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시각에는 신장(神將)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도 스님 경 읽는 소리를 잘 들었다. 기분 좋게 잘 공양받았으니 날이 새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신장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날은 하루 종일 힘이 솟았다. 적막한 밤이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두렵지도 않았다. 일타 자신을 지켜주는 신장들이 방문 앞까지 왔다가 갔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날 밤에는 신장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일타는 선정에 든 자신도 따라 웃을 때가 있었다.

“허허허.”

그럴 때 일타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서 온 신장이오.”
“태백산을 지키는 신장이오.”
“왜 밤에만 나타나는 것이오.”
“낮에는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있으니 보지 못할 수밖에요.”
“아니, 왜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스님 경 외우는 소리를 듣느라고 잠을 자지 못했으니 낮 동안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오.”

밤에는 바람처럼 영(靈)으로 돌아다니다가 낮에는 곰이나 다람쥐 등등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 때문인지 일타는 낮 동안 산짐승을 볼 때마다 한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방문을 열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면 다람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친구가 돼주었다. 처음에는 무릎까지만 오르더니 일타와 친해지자 어깨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갔다가 쪼르르 내려오곤 했다.

하루 한 끼 하는 공양 뒤에는 박새가 방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머리를 쪼기도 했다. 그러면 저절로 식곤증이 달아났다. 그러니 일타 무릎에 올라 앞발을 들고 합장하는 다람쥐나 식곤증을 달아나게 하는 박새를 볼 때마다 태백산에 지키고 있는 신장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람쥐와 박새가 보이지 않는 겨울철이면 곰이 나타났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미곰과 새끼곰이 암자 가까이까지 왔다. 어미곰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가 쿵쿵 뛰어내리며 재주를 부렸다. 입이 뾰족한 너구리가 암자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일타는 묘기를 부리는 곰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다. 한 철 먹을 양식을 도솔암에 들여놓고는 홍제사마저 내려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어쩌다 약초꾼을 만나게 되면 법당의 부처님인 듯 반가웠다. 일타는 약초꾼을 도솔암 방으로 불러들여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밥도 해주고 차도 끓여주었다.

“어디서 왔소.”
“영주에서 왔습니다. 홍제사에 들렀는데 도솔암에 도인이 한 분 계신다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이고, 누가 나보고 도인이라고 합디까. 난 신선처럼 고고하게 사는 도인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수도자일 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귀신도 부르고 산신령님하고 얘기도 나누는 도인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시고 계신 것을 보니 제가 산신각에서 본 산신령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약초꾼은 일타를 보고서는 도인이라고 우겼다. 일타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산신각에 들어가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산삼을 캐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내가 이 산에서 본 것은 더덕이나 도라지 밖에 없소. 그러니 나는 큰스님이 아니라 아직 작은 스님일 뿐이오. 하하하.”
일타는 약초꾼을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해서 차를 우려내 주었다.
“큰스님, 더덕이나 도라지는 저도 많이 캤습니다. 정말 산삼이 있는 곳을 모르겠습니까. 도인스님들은 천리 밖을 내다보는 천안통이 있다던데요.”
“사람마다 찾고자 하는 인연이 다 다른가봅니다.”
“스님이 찾고자 하는 인연은 무엇입니까.”
“맨땅 위에 누워 있더라도 참으로 편안한 무위안락이지요. 다른 말로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약초꾼은 일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타는 약초꾼이 무슨 엉뚱한 말을 하더라도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본 지 서너 달 만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는 사람이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성묘를 하고 가는지 흰 두루마기 자락이 나무 숲 사이로 희끗희끗 하더니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약초꾼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참, 큰스님.”
“무엇이오.”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큰스님께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법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해야지요. 내려가거든 그리 전해주십시오.”

일타는 홍제사에서 법문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뒷날로 미루었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아직은 스님들을 상대로 법문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부는 이제 겨우 동정일여의 경지에 다다랐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오매일여, 몽중일여까지 가야만 했다.

일타는 동정일여의 경지를 스스로 점검하곤 했다. 신장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나 지금 약초꾼과 얘기를 주고받는 순간에도 화두가 끊어지는 일이 없이 순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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