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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6

기자명 법보신문

제 11장 태백산 도솔암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도솔암 주위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암자 마당가 한쪽에 자라난 모란의 꽃봉오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봄볕을 받는 밭뙈기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고, 산비탈에 자생하는 산복숭아 꽃도 만개하여 붉은 빛깔을 흘리고 있었다. 일타는 암자 옆에 있는 단샘(甘泉)으로 나가 찬물을 떠와 끓이지 않고 녹차 잎을 띄워 우려 마셨다. 그래도 차 맛과 향은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고 성성한 화두까지 적셨다. 며칠째 일타의 몸과 화두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몽중일여(夢中一如).

좌선하는 동안 꾸벅 존 뒤 짧은 꿈을 꾸면서도 화두는 달아나지 않고 들려 있었다. 수마가 집적거려도 이제는 화두가 도망가는 법이 없었다.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언제나 밝게 비추었다. 한 달 전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내린 날부터 그랬다. 눈이 마루까지 쌓여 방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그날부터 화두는 맑은 의식으로 좌선할 때뿐만 아니라 졸거나 깜박 잠이 든 순간에도 일타 자신의 몸과 혼연일체가 됐다.

‘아, 조사들이 말한 몽중일여와 숙면일여(熟眠一如)가 이러한 것이었구나.’

며칠 전부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잠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곧잘 좌선한 채로 잠깐 동안 졸거나 아예 눈을 붙이곤 했는데 그것마저 없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하루가 무심히 한 순간에 지나갔다. 자신을 붙잡았던 시간이 없어지고 자신이 놓여 있는 공간만 있을 뿐이었다. 망상이 붙지 못하고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고 평안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문득 자신이 화두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화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먹고 마시고 보는 것이 순간순간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암자 밖에서 이리 저리 포행을 하다가 구름을 쳐다볼 때는 자신이 구름이 되고, 봄이 아우성치는 산을 보면 자신이 산이 됐다. 뿐만 아니라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자신이 계곡물이 되었다.

‘나, 일타라고 고집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날 밤은 의식이 유난히 개울물처럼 맑았다. 차갑기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같았다. 의식은 허공처럼 투명하게 깨어 있었고, 가슴은 봄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따뜻했다. 이미 일타의 의식은 방안의 시간을 벗어나 무한대의 허공에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하룻밤이 몰록 찰나에 지나가버렸다. 가부좌를 풀고 방문을 열자, 햇볕이 방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룻밤이 꿈결처럼 지난 한낮이었다. 그런데 일타에게 받아들여지는 시각은 어제의 낯익은 한낮이 아니었다.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한낮이었다.

‘어제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이나 어제의 세상이 아니잖은가. 태백산이 비로자나부처님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만발한 모란꽃의 향기가 암자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마당가 너머 비탈에 핀 야생화들도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모란꽃을 연꽃이듯 들고 계시는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아,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더 할 일이 없구나.’

일타의 눈에는 분명 부처님이 모란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마하가섭에게 꽃을 보이신 것처럼 일타를 향해 모란꽃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일타는 미소를 지었다. 전주 법성원에서 염화시중이란 화두를 든 지 실로 5년만인 1956년 음력 3월 23일의 오도였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밝은 빛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환희심에 저절로 읊조려진 깨달음의 노래였다. 일타는 모란꽃을 무심히 보다가 단샘으로 가 표주박에 찬물을 한 가득 담아 마셨다. 감로수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단샘 물의 찬 기운이 온몸을 휘돌자 주변의 산 것들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단샘 위로 쳐진 물푸레나무 가지에서는 박새들이 날아와 짹짹짹 소리쳤고, 돌담 위로는 다람쥐가 나타나 달렸다.

단샘을 보니 새삼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을 내어 주면서도 주었다는 마음 없이 주고 있는 단샘이었다. 부처님이 『금강경』에 설한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물 한 방울이 샘을 타고 넘어 흘러가 만물을 살리는구나. 저 감로의 샘이야말로 관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구나. 그렇다. 모름지기 수행자란 감로의 샘이 되어 중생을 살리는 보살이 되어야 하리.’

일타는 또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했다.

외로운 산봉우리에서도 한가롭고 평안하네
산새들은 나를 특별히 노래 부르고
소슬한 솔바람소리 청량하기 그지없도다
이 가운데 단샘 물은 길이 스스로 흐르리.

일타는 자신 속으로 진리가 들어왔음을 확신했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자신 속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순간순간 걸림이 없었고, 들끓던 망상이 환희로 바뀌었다. 잘난 사람노릇 벗어버리고 비로소 못난 중노릇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일타는 하안거를 맞이한 홍제사를 가끔 내려가 법문을 했다. 홍제사에 많은 대중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홍을 찾아온 20대의 비구니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홍제사로 들어온 비구니들이었다.

인홍은 일타보다 속가 나이로 20여 년 연상이었으나 일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로 대했다. 일타가 지난봄에 오도한 사실이 이미 홍제사 대중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일타스님, 법문을 해주시니 우리 대중들이 많이들 좋아합니다.”
“홍제사 스님들이 어찌나 열심히 참선을 하는지 인홍스님을 닮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대중에게 늘 말하지요. 나를 닮지 말고 한암 큰스님이나 성철 노장님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한암 큰스님이 스님의 계사(戒師)라고 했던가요.”
“제가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할 때 저에게 계를 주신 큰스님이지요.”
“인자하신 한암 큰스님께서 수행자로서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설 자리를 가르쳐주신 분이니 얼마나 큰 가피입니까.”
“한암 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가에 큰 선지식이지요.”
“한암 큰스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1925년인가,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오시면서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오대산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수행자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 말씀했다고 여겨집니다.”

인홍이 찾아가는 자리는 늘 선방이었다. 해방 후부터 1950년 동안거까지는 만공이 깨달음을 얻었던 덕숭산 정혜사에 있었고, 성철이 잠시 머물렀던 월내 묘관음사, 6.25전쟁 중에는 봉암사 백련암에서 정진을 했던 것이다.

“특히 1949년 내 나이 42세 때였어요. 묘관음사로 가 성철 노장님을 만난 이후 불퇴전의 용맹심을 얻었지요.”

성철은 자신의 가풍대로 인홍을 보자마자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묘관음사에 도착한 인홍이 법당으로 먼저 들어가 참배한 뒤, 연못가를 거니는 성철을 찾아 인사하려고 하자 성철은 쌀쌀맞게 손을 저었다.

“내가 누군데 절을 할라꼬 그러노.”
“성철 노장님 아니십니까.”
“성철이 누군고.”
“앞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 잘 찾아보그래이.”

인홍이 무안하여 망설이자 성철은 인홍의 등을 떠밀어 연못으로 밀어뜨렸다. 한겨울의 연못에 빠진 인홍은 겨우 연못가로 나왔지만 승복은 이미 흠뻑 젖어 살얼음이 끼었다. 그러나 인홍은 묘관음사 객사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젖은 승복을 입은 채 연못가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자비로운 한암 회상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홍은 날벼락을 맞은 듯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신심이 솟구쳤고 다시 출가한 것 같은 변화를 느꼈던 것이다.

이후 인홍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들이 다 피난 가버리고 없는 봉암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가행정진을 했다. 기필코 성불하리라는 대분심(大忿心)을 냈다. 공비들이 총을 들이밀고 협박했지만 인홍은 불퇴전의 정진력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오히려 공비들은 인홍의 가행정진에 놀라워하며 “암자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협조하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던 것이다.

훗날 성철은 이와 같이 정진한 인홍을 가리켜 “인홍은 법당 기둥 같은 스님이다”고 격려하고 인가했을 정도였다.

일타는 포행 시간을 이용하여 홍제사를 날마다 내려올 때도 있었다. 법문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한 비구니가 측은해서였다. 별명이 ‘아픈 중’으로 불리던 비구니의 건강이 궁금해서였다. 인홍이 출가했던 월정사 지장암에서 온 그 비구니는 복막결핵이란 중병에 걸려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비추는 곳을 찾아 앉아서 쓰러져 있곤 했다.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 갈대처럼 말라 있었고, 얼굴 빛깔은 바랜 창호지 같았다. 일어설 기운도 없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저 아픈 중이 살 수 있을까. 혹시 내일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비심이 많은 일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홍제사를 내려와 그 비구니의 건강을 걱정했다. 인홍의 얘기가 믿기기 않았다. 월정사 지장암에서 살던 열다섯 사미니 때만 해도 풀을 베어 하루 50짐씩 지게로 나르던 여장군처럼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17살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수년째 ‘아픈 중’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구니는 죽지 않고 하루하루 잘 버티어 냈다. 인홍은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구니가 절을 할 만큼 건강했을 때 무려 3만 배를 하고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이 있는데, 그때 성철은 목침을 들고서 그 비구니의 손끝을 내리칠 기세로 “지금 당장 죽어도 화두만 들 것이냐”고 다그쳤다는 것이었다.
일타는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그 비구니스님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심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화두를 잘 챙겨야 해요.”
“네.”
“살고 죽는 일에 끄달리지 말고 늘 화두를 챙겨야 합니다.”

초가을이 되어 태백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자, 또 한 비구니가 홍제사로 왔다. 성철의 딸 불필이었다. 그때까지 성철의 가르침을 받아 행자 생활을 했지만 아직 법명을 받지 못해 ‘수경’으로 불리던 초보 수행자였다.

불필은 “태백산 홍제사 인홍에게 가라”는 성철의 명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불필이 홍제사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태백산 능선에 걸려 있었다. 낮 동안 산으로 흩어졌던 홍제사 비구니 대중들이 저녁을 맞이하여 걸망에 약초를 가득 담고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필의 눈에는 평소에 동경하던 모습이었으므로 가슴이 뛰었다.

다음날부터 불필은 대중들과 같이 낮에는 호미를 들고 밤에는 대중 방에서 정진했다. 낮에는 고구마 밭에 나가서 고구마를 캐고 밤에는 대중 방에 앉아 화두 들고 가부좌를 틀었던 것이다. 불필은 차츰 태백산의 기운에 훈습되어 갔다. 태백산은 수행자에게 신심을 솟구치게 하는 안성맞춤의 산이었던 것이다.

불필은 도솔암으로 올라가 일타의 법문을 듣고 내려오기도 했다. 일타는 마산 성주사로 가 성철의 회상에서 동안거를 한 철 난 적이 있으므로 불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철을 쏙 빼닮은 불필을 보면 성주사에서 겨울을 났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동안거가 시작되었다. 불필은 인홍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대중 방에서 수행하는 것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속가 아버지 성철처럼 ‘문 없는 문’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인홍은 대중들과 상의한 후 허락을 했다. 당시 대중으로서는 성우, 묘경, 혜춘, 인성, 무렴, ‘아픈 중’으로 불린 현각 등이었다.

불필에게 허락된 방은 창고로 쓰는 작은 골방이었다. 초여름에 캔 감자가 방 한쪽에 쌓여 있고, 양식이 저장돼 있어 공양 때마다 스님들이 들락거렸지만 불필은 개의치 않고 ‘일주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단식과 잠을 자지는 않는 가행정진이었다. 그러나 불필은 이틀 만에 타의로 그만 두었다. 한 스님이 “저렇게 하다간 큰 병을 얻어 평생 수행을 못하게 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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