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 33. 화엄②-‘헌화가’
[이도흠 교수의 시로 읽는 불교] 33. 화엄②-‘헌화가’
  • 법보신문
  • 승인 2007.11.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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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는 모든 대립 해소된 ‘화엄’의 상징

“수로가 꽃을 따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붉은 바윗가’는 수로부인과 시종, 수로부인과 절벽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는 속스러운 세계, 즉 사법계(事法界)이다. 소를 잡고 있는 행위는 이 대립을 유지하는 행위이자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다.‘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요구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꽃을 바치고 이를 받음으로써 수로와 절벽, 수로와 노옹 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대립은 사라진다. 그러니 수로와 꽃이 대립된 것이 아니라 미(美)로서는 통하며 절벽 위의 꽃을 따면 현실의 미와 성스런 세계의 미가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법계(理法界)이다.”

<사진설명>오대산 월정사는 신라의 모든 신앙과 사상을 평화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인 동시에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까지도 품을 수 있는 지상의 구심으로 설정됐다.

신라 성덕왕은 이름 그대로 덕도 많고 힘도 강하였던 군주였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면서도 서로 맞서지 않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여러 사상과 가치를 통일할 수 있는 화엄사상을 강화하여 화엄만다라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에 성력을 기울였다. 서라벌에서 친히 신라의 관리들을 끌고 강원도 험한 산중인 오대산까지 와 참배를 하였다. 그는 이곳에 진여원을 세우고 공양과 향불이 끊이지 않도록 매년 봄과 가을에 쌀 100섬과 맑은 기름 한 가마를 각각 대라 명령을 내린다. 이를 오대산으로 설정한 것은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한 점도 있었을 것이고 기기묘묘한 봉우리가 월정사를 중심으로 많이 있어 이를 5만 보살의 현신이라고 상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파랑, 빨강, 하양, 검정, 노랑 오색과 동남서북중의 다섯 방위와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보살과 불교의 각 종파, 의례, 신앙조직을 배치하고 있다. 하얀 빛이 서린 서대(장령봉)엔 미타방을 배치하여 아미타불을 모시며 법화경을 읽고 미타예참을 하며 수정사라는 신앙조직을 두고, 누런 빛이 빛나는 중대(풍로산)엔 진여원을 배치하여 문수보살과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화엄경과 육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문수예참을 외우며 화엄사라는 신앙조직을 둔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여러 부처와 여러 경전, 여러 신앙 의례, 여러 신앙 결사조직이 월정사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나로 아우를 수 있다고 보았다.

월정사, 사상-신앙의 구심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Vairocana)은 원래 석가의 진신을 높이 부르는 칭호이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으로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하는, 불법의 지혜가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의 본존불이다. 모든 봉우리, 모든 부처, 모든 불교 종파, 모든 신앙 조직의 중심에 보천암, 비로자나불, 화엄종, 법륜사가 있다. 신라인은 뭇별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 월정사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모든 부처와 종파들이 하나로 융섭된다고 본 것이다.

화엄만다라를 공식적으로 연 왕4년 성덕왕은 교서를 내려 신라 전역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살생을 금한다. 화엄만다라의 빛, 비로자나불의 지혜의 빛이 온 신라에 고루 퍼지도록 한 것이다. 이런 이상을 품기도 어렵지만 실천하는 것이 어디 쉽다던가? 그때 신라 땅 전역에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부처님과 같이 귀중하게 여기는 불심으로 가득하였으리라.

헌화가는 사랑 노래요, 미의 노래였다. 그러나 항상 그랬을까? 헌화가는 이 사건 이후에도 수 백 년 간 신라 대중들에게 유행하였는데 몇몇 신라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하지 않았을까? 수로부인 조의 설화를 만든 신라인의 속내는 정녕 무엇이었을까?

수로부인과 노인 사이에 있었던 실제 현실은 구전되면서 설화로 변용한다. 설화로 변용될 때 중요한 것은 설화 담당 및 수요자 층의 세계관이다. 설화 담당층들은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세계관 안에서 종교와 이데올로기 등이 작용하는데 종교적 심성이 강할 경우, 현실은 성스런 세계와 속된 세계로 이분화한다. 성의 공간과 속의 공간, 신과 인간, 천상계와 지상계, 이상세계와 현실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높은 절벽’은 성의 공간이 되어 ‘사람이 발붙일 수 없는 천길절벽’으로 바뀐다.

그럼 ‘견우노옹’은? 그는 화엄만다라의 보살로 변한다. 신라인은 소를 문수보살이나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사복을 연화장으로 이끈 암소는 문수보살의 화불이다.

꽃 ‘花’에 대해 신라인은 씨와 열매를 맺기 위한 식물의 기관, 공양(供養), 천화(天花), 미(美) 등 크게 네 가지의 의미로 활용하였다. 노옹이 수로부인에게 수작을 벌이는 상황에서 꽃이 미의 뜻으로 쓰였다면 화엄만다라의 세계관의 맥락 위에 있는 신라인들은 이를 천화의 뜻으로 새긴다.

이 노래를 화엄의 사법계(四法界) 체계로 분석할 수 있다. 위 노래에서 수로가 꽃을 따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붉은 바윗가’는 수로부인과 시종, 수로부인과 절벽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는 속스러운 세계, 즉 사법계(事法界)이다. 소를 잡고 있는 행위는 이 대립을 유지하는 행위이자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요구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꽃을 바치고 이를 받음으로써 수로와 절벽, 수로와 노옹 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대립은 사라진다. 그러니 수로와 꽃이 대립된 것이 아니라 미(美)로서는 통하며 절벽 위의 꽃을 따면 현실의 미와 성스런 세계의 미가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법계(理法界)이다.

노옹은 ‘만다라’의 보살

<사진설명>월정사에 남아 있는 석조보살좌상.

사리무애법계(事理無碍法界)는 현상과 원리가 완전 스스로 존재하고 서로를 포섭하여 하나로 융합하는 경계, 구체적 사물의 구체적 현상(事)의 원리와 법이 드러나고 원리(理)는 현현하는 현상의 증거가 되는 세계다. 바다가 물결을 포용하고 물결이 바다를 포용하듯이 이와 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서로 안과 밖에 존재한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현상과 현상이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로 사가 이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사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하는, 사와 사가 무애할 뿐만 아니라 만유(萬有) 그 자체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침투하여 하나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하나인 경지이다. 즉 세계는 서로 방해를 하지 않고 서로를 비춰주고 포섭하여 하나로 융합하여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종들은 사리무애법계를 깨닫지 못하여 사법계와 이법계를 구분하여 보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노옹은 양자가 하나라는 것을, 미가 곧 수로와 꽃이고 꽃과 수로가 곧 미라는 것을, 양자가 자신의 매개로 하나로 아우러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노옹으로 인하여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성스런 공간인 바위절벽이, 그곳의 꽃이 여기 이곳에 내려져 인간의 손에 안겨짐으로 해서 수로와 시종들이 있는 지상계와 하나가 된다. 신분과 처지, 혹은 인간과 보살로 대립되었던 수로와 노옹과의 관계도 꽃을 주고 받음으로 해서 하나로 아우러진다. 즉 ‘꽃을 바치오리다’라는 언술에는, 꽃을 통하여 공간과 인물간의 대립을 원융(圓融)하여 미의 총화와 화엄의 높은 이상이 빛나는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 모든 대립과 갈등이 없어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로 지향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헌화가는 꽃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의 대립이 있는 현실 세계를 떠나 미의 총화와 화엄의 이상이 빛나는 사사무애법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래다.

현실 세계서 정토 구현 소망

그렇게 신라인들은 모든 대립과 갈등을 하나로 원융시켜 화엄만다라를 이루고자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현실과 이상, 예토와 정토를 하나로 아우르고자 하였다. 언어기호와 이성으로 다다를 수 없는 여래장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하였고 이를 높은 예술로, 종교로 표현하였다. 이런 삶이 모여 남산에 그토록 아름답고 성스러운 불국토를 이루어 놓았으며 쉬우면서도 새길수록 삶의 깊이가 절절한 향가를, 진리의 원음(圓音)을 내는 신종(神鐘), 봉덕사종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화엄은 총체성의 원융을 지향한다. 화엄은 모든 사물과 계가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경계이다. 화엄의 총체성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물리치거나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조화를 이루고 모순되는 것이 무애로 바뀌는 것이다.

법장은 측천무후에게 화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사면이 거울인 방으로 데리고 가 가운데 불상을 놓고 촛불을 켠다. 그러자 무한대의 불상이 서로를 비추며 어느 것이 실재 불상이고 어느 것이 상인지 경계를 무너뜨린다. 거울에 비친 불상의 모습은 참 실재가 아니라 상(像)이다. 그것은 초와 거울에 의존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촛불이 비추는 것과 불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내가 깨닫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계(界)에서 서로 다른 실재들이 모두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니 세계는 동시돈기(同時頓起)한다. 촛불에서 나온 서로의 빛이 서로에게 헤살을 놓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관통하고 서로를 이끌어 들이고 있으니 세계는 동시호입(同時互入)한다. 거울이 만물을 반사하기에 거울이고 동시에 다른 무엇에 의해 반사되기에 상(像)인 것처럼, 우주에 있는 일체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포섭하고 있기에 서로 반사경인 동시에 영상이니 세계는 동시호섭(同時互攝)한다. 촛불이 무한대로 비추는 방안에 수정공을 가져다 놓으면 그 수정공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비춰진다. 그러니 일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곧 일체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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